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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쿠웨이트 뉴 오일피어(떠내려간 바지선)

등록일 : 2015/03/02

1999년 12월, 쿠웨이트 뉴 오일피어(Kuwait New Oil Pier) 공사 입찰 및 낙찰과정은 예사롭지 않았다. 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일본의 유수한 건설회사와 그리고 현대건설 이렇게 4파전이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2등과 4% 차이로 최저가 입찰자(Lowest)가 되었다.

쿠웨이트 공사의 경우 통상적으로 Lowest가 되면 제출한 입찰서에 대한 해명 절차를 거치고 해명을 마치면 LOA(Letter of Acceptance)를 받고 2주 정도 후까지 은행으로부터 수행보증서를 받아 제출하면 정식 계약을 하게 된다. 그런데 수행보증서를 끊고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하지만, 발주처로서도 최종계약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약 이후 현대건설이 파산하면 발주처도 최소 1년 이상의 공기 지연은 불가피했다. 나중에 안 일인데 발주처에서 내부 정보망을 동원해 현대건설을 실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현대건설은 망할 회사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종림 부장은 가슴을 죄며 낙찰통보를 기다리다 계약을 체결하고 현지로 출발하였다. 쿠웨이트 오일피어 공사는 쿠웨이트 전체 3개의 항만시설인 ‘North Pier’와 ‘South Pier’ 그리고 ‘Shuraiba Pier’ 중에서 ‘South Pier’를 대체하는 신 증설공사였다. 해상공사가 주공종이다 보니 공사 초기에 몇 차례 바지선이 떠내려가는 일이 벌어져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끌어오곤 했었다.

 

그런데 현장소장이 본사 출장으로 현장을 비운 바닷바람이 거세던 어느 날 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현장의 바지선 한 척이 ‘Shuraiba Pier’ 쪽으로 흘러내려가 밤새도록 안벽과 Pier의 정유 파이프라인을 들이받아서 Pier의 해상구조물 일부가 주저앉고 수출용 파이프라인들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연락이 다음날 새벽에 왔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감이 오질 않았다. 바지선을 묶은 60㎜ 밧줄이 파도에 흔들리는 2,000톤짜리 바지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끊어졌던 것이다.

 

“정유공장 가동이 올스톱되고 수출 스케줄이 중단되었습니다. 쿠웨이트는 국가적인 비상사태로, 상황이 이라크에서 스커드 미사일이 날아올 때와 같은 정도였습니다. 습격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죠.”

 

당일 오전 Shuaibar 정유소에서는 비상대책회의가 소집되어 정유공장의 모든 매니저들이 회의실에 집합해 있었고, 이종림 부장은 피고인의 심정으로 그 앞에 섰다. 제일 먼저 안전/환경 담당 매니저가 따져 물었다.

 

“당신들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냐 없는 사람들이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도대체 이런 일이 왜 일어난 것이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도저히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때 정유공장장이 흥분한 매니저의 말을 막아섰다.

“현재 우리 공장은 비상사태입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사태를 슬기롭게 수습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의 책임인지는 나중에 얘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왜(Why)’ 라는 말은 더 이상 꺼내지 마십시오. 어떻게(How) 복구할 것인가만 논의합시다.”

 

이종림 부장은 조사를 해서 복구대책을 세우겠다는 답을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복구를 위해 한 달간 돌관 작업이 이어졌다. 공사하던 배들을 모두 끌어와 24시간 투입했다. 초반 10일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복구가 어느 정도 진전되면서 복구 이후 패널티와 보상이 얼마나 나올지가 걱정이었다.

 

복구를 마치고 나니까 발주처에서 하는 말이 사고 때문에 두 번 놀랐다는 것이다. 어느 배가 오일피어를 습격했는데 그것이 가장 믿었던 현대건설 배라서 한 번 놀라고, 복구 작업이 이렇게 빨리 끝나서 또 한 번 놀랐다는 것이다. 모든 피어가 저마다 스케줄이 있는데 ‘Shuraiba Pier’로 일정 조정이 불가한 유제품을 실으러 배가 들어오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시점까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그 안에 작업을 마친 것이다.

 

덕분에 보상과 패널티 역시 쉽게 마무리되었고, 오히려 감사장을 주려고 했지만 사고 당사자에게 감사장을 준다는 것이 모순이라 하여 취소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이 사건으로 해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왜(Why)’는 문제를 제기하지만 결국 해결책은 ‘어떻게(How)’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종림 부장은 어차피 사건이 터지면 해결책부터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메인 공사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2003년 1월 미국과 이라크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첫 날 밤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현장 앞바다에 미사일이 떨어졌다. 외국인 근로자들을 철수시키기 위해 인솔하여 도착한 쿠웨이트 공항은 피난 행렬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공항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걸어 다닐 수가 없어 쌓아 놓은 짐들 위를 밟고 다녀야 했다. 비행기도 공습으로 불규칙하게 이륙을 하는데 설상가상으로 컨베이어 벨트가 고장이 나서 짐을 부칠 수가 없었다. 짐을 안 가지고는 철수를 못하겠다는 근로자들에게 짐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근로자와 가족들을 철수시키고, 이종림 부장과 관리부장, 소장, 공장장 이렇게 네 명이 현장에 남았다. 잔류자 4명이 남아서 숙소에 대기하고 있던 이튿날 밤 숙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큰 풍선이 터지는 맑은 소리가 들리고 유리창이 파르르 떨렸다. 숙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어시장 앞바다에 미사일이 떨어진 것이었다. 죽음이 바로 머리 위로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이후 공사가 재개되었고, 국무총리를 비롯해 많은 내외빈이 쿠웨이트 뉴오일피어 현장을 찾았다. 방문객을 맞을 때마다 이종림 부장은 머리 위를 가로질렀던 미사일 생각이 떠오르며 살아 있음에 감사했다. 그는 지금도 참으로 잊지 못할 현장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공사를 무사히 마친 덕에 현대건설은 뉴 오일피어 5·6번 부두확장 공사까지 수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