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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걸프전 포염 속을 뚫고 탈출하라, 필자 김종훈氏

등록일 : 2015/03/16

1991년 1월 17일 새벽 2시 30분.

 

콩 볶아대는 듯한 기관총 소리와 심장을 울렁거리게 하는 요란한 대공포 폭음에 잠을 깨어 뛰쳐나온 우리들은 눈앞의 하늘이 온통 시뻘건 탄막으로 뒤덮인 것을 보고 한동안 말을 잊은 채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얼마가 지나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다국적군이 며칠 전 사우디에서 상륙 훈련을 했다더니 이라크도 이에 대응해서 대대적인 방공훈련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걸프의 전운이 심상치 않음을 육감으로 느꼈다. 방으로 들어가 즉시 단파방송의 채널을 맞추어 보았다. 평소 우리는 아랍어를 모르니 뉴스는 주로 단파로 보내는 BBC 방송과 쿠웨이트 사태 이후 미국 방송(VOA)에 의존해 왔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전파 방해가 심해 거의 뉴스를 들을 수 없어 답답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날도 단파방송은 전파 방해음으로 인해 전혀 들을 수가 없었다.

 

다시 밖에 나가보았을 때, 얼핏 전투기 비행음 소리가 났다. 조금 있다가 “쿵”하는 소리가 진동하고 이어서 붉은 포탄의 광채가 밤하늘을 넓게 물들여 서둘러 방공호로 대피했다. 방공호에서 계속 라디오의 채널을 맞추어 보았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영국방송이 겨우 잡혔다. 전쟁이 발발하고 다국적군이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대대적으로 공습하고 있다고 전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현장을 지킨 사람들

 

1,300년이 넘은 고도 바그다드가 또 다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기습적인 쿠웨이트 침공 이래 유가 폭등,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의 사우디 파병, 아랍국가들의 중재 실패, 대이라크 경제 제재와 이라크의 외국인 억류 및 인간방패 이용설 등으로 세상은 매우 시끄러웠다. 결국은 1월 15일까지 이라크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무력 제재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UN 결의안이 채택되기에 이르렀지만 많은 사람들은 ‘설마 전쟁으로까지 발전하지 않겠지’하고 생각해 왔다.

 

미국이 제시한 대화 시한인 1월 2일이 무위로 지나감에 따라 사태는 급박하게 악화되어 갔다. 1월 12일 주이라크 미국대사관이 완전 철수하였으며, 한국대사관도 1월 15일 아침에 철수하였다. 우리 근로자들도 1월 14일 거의 다 철수하고 극소수 인원만 잔류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8년여 동안 이란과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강국을 제일 목표로 하는 정책으로 인해 국민들의 삶이 비참하였다. 물자는 적고 극심한 인플레와 희망이 안 보이는 생활로 사람들은 의욕을 잃었고 도둑이 들끓는 등 정국이 불안했다.

 

1990년 11월 쿠웨이트에 있는 현대건설 현장을 답사했는데 참으로 비참했다. 사무실의 모든 서류는 주변에 흩어져 바람에 날리고 비품류는 거의 없어졌거나 부서져서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숙소에 있던 매트리스마저 터졌고 에어컨 등 집기류도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현장 자재는 말할 것도 없고 장비도 쓸 만한 것은 거의 없어졌거나 부품을 몽땅 뜯어가서 잔해만 남아 있었다. 평소 사람이 있어도 총을 들이대고 물건을 강탈해 가는 경우가 이따금 있었으니 아무도 없는 쿠웨이트 현장이 오죽하겠나 싶었으나, 막상 실상을 눈으로 확인하니 분노가 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라크 현장에는 수많은 장비와 자재가 있고 완공 단계의 공사장도 여러 곳에 있어 우리가 모두 떠나버리면 그 손실이 막대하였다. 이라크정부 측은 쿠웨이트 합병은 잃었던 권리 회복일 뿐이며, 이젠 모두 정상화되었으므로 우리에게 남아서 공사를 계속해줄 것을 요구하며 좀처럼 출국을 허용해 주지 않았다. 이라크로부터 받아야 할 공사대금 미수액도 많고 그동안 우리 회사에 대해 이라크 정부가 상당히 호의적으로 대해줘 큰 어려움 없이 공사를 수행해 올 수 있었으며 장래의 공사 전망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이라크가 미국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에 맞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예상이었다. 휴가 온 아들에게 이라크 부모들은 만약 전쟁이 나면 맞서 싸우지 말고 포로가 되도록 하라면서, 그래야 살 수 있고 밥도 잘 얻어먹을 수 있다고 당부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전원 철수 결정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신없이 뿜어대는 이라크의 대공포와 다국적군의 폭격소리는 아침 6시가 되어서야 멈추곤 하였다. 우리는 이미 안전지대에 대피소를 마련해 두고 필요한 식량과 일용품 등을 일부 이송시켜 놓았다. 또 일부는 차에 실어놓거나 방문 앞에 싸놓아 만약의 경우 5분 이내에 떠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그러나 뉴스 내용과 실제 폭격 위치로 보아 우리가 있는 지역은 심각한 위험이 당장은 없어 보여 너무 급히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우선 사무실로 뛰어가서 전화통에 매달렸다. 서울은 아침 출근시간에 전쟁 발발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가족들의 경악과 걱정, 회사사람들의 당혹함, 국민들의 우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가 입게 될 경제적 타격, 망국적인 물가 상승이 해외 근무를 실망케 만들어 왔지 않았는가. 무엇보다도 가족과 회사가 걱정스러웠다. 먼저 우리의 안전함과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의견을 알려야 했다. 3대의 전화통 다이얼을 불이 나게 돌렸지만 역시 허사였다. 국제전화는커녕 시내조차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우리는 일단 바그다드 동북방 약 60km 지점의 바쿠바라고 하는 소도시 변두리에 있는 안전지대 대피소를 향하여 바그다드 캠프를 떠났다. 큰길은 피난민 대열로 꽉 메워져 있었고 차량은 매우 느리게 움직였다. 번호판 색깔이 달라서 쉽게 구분되는 외국인 차량은 우리 일행 이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어린아이들은 손을 흔들기도 했다. 교통경찰이 열심히 안내를 하는 가운데 모든 차량들이 끼어들기 하는 일 없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평소 일하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이라크인들의 수준 높은 면모를 보며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기름이 나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는 고대문명의 발상지요, 이슬람문화가 꽃 핀 풍요로운 땅에서 이들은 왜 이토록 고달픈 생을 영위해야 하는 것일까.

 

 

불타는 바그다드를 빠져나가라

 

두 시간이 넘게 걸려 바쿠바 대피소로 도착하여 짐을 풀고 숙소를 정리하며 타 지역의 우리 근로자들이 무사히 합류하기를 고대하였다. 특히 바스라 현장의 우리 인원들의 안위가 크게 걱정되었다. 아침 겸 점심으로 라면을 들고 있을 때, 바그다드 남쪽 90km 떨어진 알무사이브 발전소 현장 사람들이 얼굴이 핼쑥해져서 도착했다.

 

모두 무사했지만 아침에 이곳을 향해 막 떠나려는 참에 미사일 3기가 발전소 언저리에 떨어져 숙소 천장이 떨어져 내릴 정도였다고 했다. 파편이 날아들어 그 중 하나를 주워 왔다는데 수도꼭지보다 약간 큰 것이 날카롭게 찢겨져 있었다. 아찔하여 현기증을 느꼈다.

 

바스라 현장 사람들에 대한 걱정에 가슴이 조여 와서 먹던 라면그릇에 손이 가질 않았다. 밖에 나가 방글라데시인 근로자들에게 물을 아껴 쓰고 주위 청결을 유지하도록 지시하고 라디오 안테나를 높이고 돌아서려는데 그토록 조바심 나게 했던 바스라 인원들이 웃으면서 들이닥쳤다. 한국인 2명, 제3국인 4명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져 얼싸안았다. 큰 고통 없이 모두 무사히 도착했던 것이다.

 

이젠 북쪽의 두 개 현장 사람들이 걱정이었다. 비교적 안전지대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포격의 범위가 급히 확대되어가고 정도가 심해지니 역시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하여 바쿠바 시내에 가서 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역시 불통이었다. 사태 발생 시 이곳으로 합류키로 하였으니 기다려 볼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되어 북쪽의 한 현장인 베이지 현장 인원이 도착했다. 처음에는 놀랐으나 베이지 현장에서 좀 떨어진 베이지 정유공장에 폭탄이 떨어져 타는 것을 보다가 문득 이곳에서 걱정을 할 것 같아 다니러 왔다고 했다. 이제 키루쿡 현장의 소식만이 궁금했다.

 

다음날 베이지 인원이 짐을 챙겨 다시 오기 위해 현장으로 가는 도중 키루쿡을 거쳐 속히 이곳으로 합류할 것을 전달하기로 했다. 키루쿡은 이라크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전지대이므로 함부로 폭격할 수 없는 곳이다. 우리 공사장은 키루쿡의 숙원사업인 상수도 공사 현장으로, 튼튼한 지하 물탱크가 있고 그 밑에 다시 철제 대형관이 묻혀 있는데 이곳을 방공호로 이용하기도 해서 타 지역에 비해 위험성이 매우 적은 곳이었다.

 

바그다드시 공습은 주로 야간에만 파상 공격을 했으며, 낮에는 교외 특수시설물만 폭격하는 것 같았다. 다국적군의 전투기 선회로가 바쿠바 상공인지 자주 대공포를 우리 머리 위로 쏘아댔으며 밤에는 놀란 늑대들과 여우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요란했다.

 

1월 19일이 되어 이란 쪽 국경을 현지인과 직원 두 명이 답사한 후 가능하다면 북쪽 현장인원이 합류하는 대로 탈출하기로 했다. 저녁때가 되어 키루쿡 현장의 방글라데시인 두 명이 무사함을 알리러 왔다. 그곳은 대공포 소리만 들릴 뿐이며, 현재로서는 이곳으로 합류할 의사가 없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전혀 외부와의 통신 연락이 안 되니, 서울 본사를 비롯해 고국의 가족들이 전쟁지역에 남아 있는 잔류인원의 생사 문제로 얼마나 궁금해 하고 걱정하겠는가를 생각하여 하루라도 빨리 이라크를 빠져나가야겠다는 판단이 앞섰다.

 

1월 20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에 무사함을 알려야겠기에 바그다드 시내를 돌아다녔다. 한국대사관 무전기는 사용할 수가 없었고, 요르단 대사관에서는 협조해 주고 싶어도 전기가 없어 불가능하다고 했다. 영국방송 취재팀을 찾아갔는데 그들도 호텔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소련대사관이 잔류한다고 해서 찾아 헤매던 중 공습이 시작되어 우리 캠프를 거쳐 바쿠바로 되돌아 왔다. 바그다드 시내의 우체국, 방송국, 국방성 건물 등이 폭탄을 맞았으며 발전소와 정유공장이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심하게 폭격을 당한 공항과 후세인궁은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 파손 상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공습의 위협에 국경을 넘기로 결정

 

1월 21일 오후, 우리는 이란 쪽으로 탈출하기 위해 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코쉬라위 국경으로 갔다. 요르단 쪽의 통행이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거리도 멀고 황무지라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코쉬라위 국경수비대는 임시이민국 사무실까지 접근조차 시키지 않으며 초소 밖에서 기다리라고만 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백명 정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실랑이 끝에 책임자를 만나 결국 1km 정도 안쪽에 있는 이민국 사무실에 갔으나 역시 초소 밖에서 세 시간을 기다리라고 했다.

 

세 시간쯤 기다려 밤 8시가 약간 지난 시간에 다시 수비대원 한 명과 함께 여권을 모아 가지고 갔다. 여권을 한참 들여다보던 이민국 직원은 우리의 출국 비자상에 통과 국경이 다르기 때문에 바그다드 이민국에 가서 수정해 오라고 했다. 전시 난민이니 도와줄 것을 요청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다른 문제는 없는가를 재삼 다짐하고, 그들에게 이란 쪽에 있을 우리 일원들에게 메모를 전달해줄 것을 부탁한 후 일단 바쿠바로 되돌아 왔다. 베이지와 키루쿡 인원은 아직도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전체 인원은 한국인 22명, 제3국인 84명이었다.

 

1월 22일 아침 일찍 현지인이 지키고 있는 바그다드 캠프를 들러 이민국에 갔다. 골목 어귀의 전신전화국이 박살나 있었고, 인근 건물도 손상이 심해 섀시 등의 파편이 100m 넘는 거리에까지 쫙 널려 있어 전율을 느꼈다. 비자 수정 후 코쉬라위 국경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어제와 같은 시각인 오후 4시였다. 그런데 낯을 익힌 국경수비대장은 웃으면서 국경이 닫혔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농담인 줄 알았으나 막상 이민국 사무실에 가서 이를 확인했을 때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항의도 사정도 소용없이 상부 지시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권하는 한국 담배도 뿌리치며 이라크 담배만 피우겠다는 이민국 직원들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얼마 후, 그들은 사라지고 캄캄한 산중에 나만 멍하니 서 있음을 깨달았다. 곧이어 함께 온 수비대원이 다가와 이제 돌아가자고 해서 일단 초소 밖에서 대기하던 일행들과 함께 바쿠바로 돌아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자정이 넘어 돌아와 라면으로 저녁 끼니를 대신했다.

다음날 다시 바그다드로 가서 외무성 영사국장을 찾았다. 더 이상 공습 사이렌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요구한 명단을 작성하여 두 시간 후 다시 찾았을 때 이민국으로 가보라고 했다. 이민국에서는 오후 2시 30분에 오라고 했다가 다시 갔을 때는 내일 아침에 오라고 했다.

 

 

가까스로 탈출하기까지 피 말리던 시간들

 

다음날인 1월 24일 아침 일찍, 우리는 이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시간 절약을 위해 대피소에서 큰길로 나와 바그다드로부터 여권을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예상시간이 훨씬 지나서 허겁지겁 달려온 우리 직원의 손에는 여권이 아닌 읽을 수 없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출국 희망 각서’라는 내용의 아랍어로 된 서류였다. 모든 인원이 각자 서명을 해서 제출해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불길한 생각과 함께 바그다드로 내달렸다.

 

그 사이 바그다드 캠프에서 현지인이 각서를 만들었다. 그 각서를 가지고 이민국에 다시 갔더니 1월 26일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그는 험악한 얼굴로 “이유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일단 여권을 다시 찾아 캠프로 돌아왔다. 일이 이쯤 되면 절차상의 문제는 이미 떠난 것이다. 즉시 바쿠바로 돌아와 일주일쯤 국경에서 노숙할 준비를 하고 다시 국경으로 갔다. 가는 도중 평소에 점검하지 않던 중간 초소에서 검문을 했다. 사태가 매우 나빠져 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 불안했다.

 

국경에 다다라서는 수비대장에게 큰 웃음을 지어보이며 “아무 문제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초소 안쪽에 들어가서 농성을 해야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수비대장은 우리가 이 장소에 세 번째나 다시 와서 그런지 우리를 믿고 모두 초소 안쪽으로 들여보냈다.

 

세관원이 나와서 짐을 조사하다가 문득 한 사람만 여권을 갖고 이민국 직원에게 가보자고 했다. 얼마 후 되돌아온 그들은 우리들을 몰아세워 타고 간 버스 안으로 들어가게 한 다음 몇 사람을 불러냈다. 출국비자가 완벽한 사람만 국경을 통과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의 비자는 하루 이틀씩 유효기간이 지나 있었다. 비자 기간 연장을 2~3일씩밖에 안 해주고 며칠을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공교로운 상황을 맞은 셈이었다. 이때 국경에 있던 우리 인원은 한국인 9명, 방글라데시인 39명, 태국인 2명이었는데 이중 출국 가능한 사람은 한국인 2명, 방글라데시인 28명뿐이었다. 어차피 농성을 각오했는데 이나마도 다행이고 무엇보다도 본국에 우리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어 다소 안심이 되었다. 일단 보내놓고 또 부딪쳐보리라 다짐하고 순순히 그들의 요구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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