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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해외건설협회 출범의 가슴 벅찬 순간들, 필자 연규태氏

등록일 : 2015/05/21

누구에게나 각별히 잊지 못하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날이 있게 마련이다. 내게 있어서 11월 3일이 특히 더 그러하다.

11월 3일. 그렇다. 이 날은 지난 일정시대 때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정부에서 정식으로 제정한 학생의 날이기도 했으며, 아울러 내가 14년간 신명을 다 바쳐 봉직한 해외건설협회가 창립된 날이기도 하다. 그뿐이 아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인권 외교를 강조하면서 대권에 도전한 미국 남부 출신의 땅콩농장주 지미 카터가 현직 대통령인 제럴드 R. 포드를 박빙의 리드 끝에 물리치고 새롭게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된 날이기도 하다.

 

1976년 11월 3일 오전 11시 30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하늘은 전형적인 늦가을의 청명한 날씨였다. 하늘은 맑게 개어 구름 한 점 없었으며, 간간이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아름답게 물든 단풍잎들이 시나브로 떨어져 내리곤 했다.

 

마침내 해외건설협회의 창립을 선포하는 힘찬 방망이 소리가 장내외에 울려 퍼졌다. 나는 이 역사적 탄생을 지켜보기엔 너무나 가슴이 벅차서 슬그머니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고, 금방이라도 손을 담그면 새파랗게 물이 들 것만 같은 남산타워 위의 서울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절로 큰 한숨이 나왔다. 길고도 오랜 고통이 눈 녹듯 사라져 가고 있었다.

 

무릇 한 생명의 탄생에도 태몽으로부터 시작되는 탄생의 비화가 얽혀 있기 마련인데, 하물며 장차 국가경제를 등에 짊어지고 나아갈 한 단체의 탄생에 있어서랴. 나는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동안 공들여온 해외건설협회의 탄생을 눈여겨 지켜보면서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해외건설협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1976년 11월 3일 해외건설협회 창립총회]

 

 

 

새로운 기구의 설립 제기

 

당시 우리나라의 건설 수출은 1965년의 월남 파병을 기화로 본격화되었다. 월남이 패망할 무렵에는 풍부한 오일머니를 발판으로 혁명적 국가산업망 확충을 강조하던 중동 쪽에 활로를 뚫어 한창 건설 수출 드라이브가 걸려 있었다. 이때 건설의 해외 수출을 능동적으로 주도해나갈 새로운 단체의 탄생을 강력히 요구하는 하나의 역사적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미 잘 알려진 얘기이긴 하지만 새삼 언급해 본다면 그것은 현대건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주한 주베일 산업항 항만 조성 공사였다. 공사액이 무려 9억 3100만 달러에 달하는 이 공사는 그때까지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수주한 공사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미국의 벡텔사를 비롯한 세계의 내로라하는 유명 건설회사가 이미 오래 전부터 눈독을 들여온 그런 공사였다.

 

그러한 대규모 공사를 자본과 기술 그리고 경험 면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대한민국의 한 건설업체가 따내자 전 세계의 건설인들은 경악에 빠졌고, 우리나라의 매스컴들은 연일 특종으로 내보내느라 아우성이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달러라면 공연히 기가 죽고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버릴 때였다. 그런 때에 약 10억 달러의 공사라면 그건 상상을 초월하는 천문학적 숫자인 동시에 누구에게나 자긍심을 갖게 하는 그런 사건이기도 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우리나라의 건설행정을 담당하는 정부 관련부처와 국내 건설업을 대표하는 몇몇 주인공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던 중 자연스럽게 해외건설 수출을 전담할 새로운 기구의 설립이 제기되었다.

 

이날의 모임에는 당시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 씨를 위시해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 동아건설의 최준문 회장, 대림산업의 이재준 회장, 삼환기업의 대표이자 대한건설협회 회장이던 최종환 회장, 그리고 삼부토건의 조정구 회장 등이 참가했다.

 

그런데 이 모임에 참석한 경제인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모두 한결같이 침체된 우리나라의 경제적 난관 극복을 해외건설 수출에 두고 있던 인사들이었으므로, 일단 새로운 기구가 필요하다는 데에 의견의 합의를 보았고 이를 실현시키는데 가속도를 가하도록 독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 그때까지는 대한건설협회 내에 건설수출진흥원을 두어 이곳에서 해외건설 수출업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의 입수나 자금, 인력 면에서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또 하나의 단체가 탄생되는 것이 강력히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해외건설 수출업무만을 전담하는 새로운 독립기구의 탄생이 이처럼 강력히 요구되자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조직과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설립준비위원회 구성과 밤낮 없었던 설립 작업

 

그리하여 우선적으로 협회 창립추진기구의 설립을 논의하기 위해 다시 한번 모임을 갖게 되었다. 장소는 송암이란 한식점이었으며, 참석자는 앞에서도 거명한 김재규 당시 장관을 비롯해 정주영, 이재준, 최종환, 조정구 제(諸) 회장, 그리고 한국해외건설의 백선진 사장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식으로 가칭 ‘해외건설협회 설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준비위원장으로는 당시 동양통신 사장으로 재직하던 전 재무부 장관 홍승희 씨가 선임되었고 실무책임자로 전 건설부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한 정재덕 씨, 그리고 실무위원에 본인이 임명되었다.

 

이 날의 모임을 기폭제로 해서 해외건설협회 설립 준비는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해외건설협회가 탄생하면서 상근부회장으로 3년여 동고동락한 정재덕 씨를 필두로 본인을 포함한 실무진들은 이때부터 당시 대한건설협회 사무실이 있던 시청 뒤 건설회관 4층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격무에 들어갔다. 그러고도 시간이 모자라 인근 여관방에 서류를 가져다가 밤이 꼬박 샐 때까지 업무를 계속하는 일과가 수없이 반복되었다.

 

한 생명의 탄생에는 10개월이라는 잉태 기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그런데 해외건설협회의 설립을 촉구한 인사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격동기의 한국경제를 이끌고 온 백전노장들인데다가 어떤 난관이 들이닥쳐도 능히 이를 타개할 배짱과 용기 그리고 추진력을 겸비한 분들이었다. 이들은 해외건설협회를 연내에 발족시키기 위해 우리 실무진들을 매우 분주하게 만들었다. 그렇잖아도 현대건설의 주베일 산업항 항만 조성 공사 수주를 기화로 국내의 많은 건설업체가 중동 일원에서 크고 작은 각종 공사를 엄청나게 많이 따내고 있었으므로 누구보다도 해외건설협회의 창설이 빨리 현실화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던 우리 실무진들은 정신없이 업무에 몰두해 나갔다.

 

사람이란 능력에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 배경이 달라지면 이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도 달라지는 것인가. 우리 실무진들은 밤낮 없이 업무를 추진해 나가면서도 도무지 피곤한 줄을 몰랐다. 당시 실무진들이 자주 이용하던 여관은 건설회관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매일 밤 서류뭉치를 싸들고 가곤 했기 때문에 정이 듬뿍 들어서 숫제 우리들을 ‘장기하숙생’이라 부르며 한 가족처럼 대우해 주었고, 우리도 내 집처럼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서양 속담에 ‘바쁜 꿀벌은 슬퍼할 틈이 없다’라는 말을 이때처럼 절실하게 실감한 적이 없다. 협회 설립을 위해 각종 참고문헌을 두루 섭렵하고 산더미처럼 책상 위에 쌓인 자료를 검토하다 보면 어느새 창문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빠른 것인 줄은 정말로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우리들은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간단히 세면을 하고는 여관을 나섰고, 그리고는 역시 단골이 된 근처의 해장국집을 찾아가곤 했다. 너무나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문을 여는 변변한 음식점이 있을 턱이 없어서 우리들은 죽으나 사나 아침을 해장국으로 때웠다. 그러다보면 시내 중심가의 여러 호텔 나이트클럽과 그때 한창 젊은이들에게 유행하던 고고장에서 나온 일단의 춤꾼들과 어울려 아침식사를 하게 돼서 본의 아니게 춤꾼으로 오인 받는 수도 있었다. 그들은 춤을 추며 술을 마시느라 얼굴이 붓고 눈동자가 새빨갛게 변해 있는 반면에 우리들은 밤새 일을 하느라 몸이며 행색이 그들과 똑같았다. 고백하거니와 그때 먹은 해장국이 얼마나 입에 물렸으면 아직도 나는 해장국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광범위했으며,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훑어보아야 할 자료만도 거짓말 조금 보태 실무진 모두의 책상마다 작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법인단체 설립이란 참고자료나 찾아보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발췌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절대로 아니었다. 한 단체가 정식으로 탄생하려면 이에 합당한 법률적 절차며 법령 제정이 모두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우리 실무진들과 당시 건설부 기획관리실장이던 이규효 씨, 그리고 해외협력관이던 박문영 국장, 강필원 과장 등이 협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해외건설협회 탄생

 

이렇게 해서 드디어 1976년 11월 3일, 유사 이래 대한민국 최초의 해외건설협회가 프레지던트 호텔 31층 슈벨트홀에서 고고의 함성을 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외건설협회 설립추진위원회는 사무국으로 확대 개편되고 시청 뒤에 있는 건설회관에서 시청 앞 동방빌딩 14층으로 이전하였다.

 

미리 예상 한 바 그대로 창립총회에서는 설립추진위원장으로 온갖 고생을 도맡아 한 홍승희 씨가 당분간 동양통신 사장과 해외건설협회장을 겸임키로 결정이 났으며 상근부회장에 정재덕 씨, 비상근회원부회장에 삼환기업 최종환 회장이 선임되었다. 당시 총회에서 선임된 이사진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의장에 홍승희(협회장으로서 당연직), 이사에 정재덕(상근부회장, 당연직), 정주영(현대건설), 이준용(대림산업), 최원석(동아건설산업), 조정구(삼부토건), 김영필(협화실업), 김동환(대신토건), 양재권(국제전기), 전민제(전엔지니어링), 백선진(한국해외건설), 그리고 감사에 강민구(한국건업) 제씨가 선임되었다.

 

창립총회는 오전 11시 30분경에 시작되어 삼환기업 최종환 대표이사가 임시의장으로 총회를 주재하고 부의(附議)된 5건의 안건 가운데 정관 제정을 우선적으로 심의하여 전문 41조 부칙으로 된 정관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이어 홍승희씨가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건설부 장관의 치사와 조정구 삼부토건 회장의 설립 경과보고 및 만세삼창으로 총회의 막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 후 동방빌딩 14층에 ‘해외건설협회’라고 쓴 현판이 정식으로 내걸렸으며 일사불란한 팀워크로 사무국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해외건설협회가 창설되면서 우리나라 해외건설은 순풍에 돛을 단 격으로 일취월장(日就月將)의 호기를 맞고 있었다. 자고 나면 새로운 회사가 중동을 포함한 동남아 또는 아프리카지역에서 각급 공사를 수주해 냈으며, 동시에 이미 진출해 있는 해외건설의 선두주자 격인 대형건설업체들도 플러스알파를 향해 일로매진이었다.

 

 

[1976년 11월 3일 해외건설협회 창립을 하고 만세삼창을 하는 회원들]

 

참으로 엄청난 공사가 우리 한국인의 손과 땀에 의해 세계 도처에서 건설되고 그 결실은 무엇보다도 귀한 달러가 되어 국내로 유입되었다. 때마침 불어 닥친 전 세계적 경제 불황을 무난히 극복하는 담보가 됐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해외건설이 80% 이상 진출한 중동 일원의 각국은 머잖아 도래할 석유 고갈 시기를 대비해 천문학적인 대규모 공사를 계획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공사의 종류는 대부분 산업시설의 기초공사가 아니면 기반시설 확충사업이었다.

 

따라서 고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고차원의 기술집약적 공사보다는 건물을 세우고 다리를 놓으며 도로를 개설하는 따위의 공사가 많았으므로 우리 근로자들이 흘린 피와 땀은 그대로 소중한 달러로 바뀌어져 국내로 흘러들어왔다. 그동안 우리나라 해외건설이 얼마만한 공사를 수행하고 얼마만한 달러를 벌어들였는가는 오래 전부터 각종 자료나 매스컴을 통해 자세히 알려졌으므로 언급을 회피하거니와, 어쨌건 이 달러는 우리나라 경제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새로운 웅비를 향한 활력소가 되는 데 두루 요긴하게 쓰였다.

 

일단 해외건설협회가 설립되자 이를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 해외건설은 상승효과를 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자연히 사무국도 확대 개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초대 회장으로 6개월여를 근무한 홍승희 회장의 면모를 잠시 거론하련다. 깡마르고 날카로운 외모에서 풍기는 첫인상이 그렇듯 이분은 공선사후(公先私後)를 몸소 실천하는 대쪽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 예로 협회가 기구의 확대를 꾀할 때마다 자천타천의 수많은 인사가 이력서를 들이밀었지만 한 번도 이의 수락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참으로 불공정한 것을 싫어하는 전형적 청백리의 표본이 아니었나 지금도 나는 생각하곤 한다.

 

 

협회 출범 이후 첫 행사

 

해외건설협회가 출범하고 첫 행사로 중동국가의 하나인 오만의 공공사업성 장관을 초청해 ‘한·오만 간 건설협력증진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공항으로 마중을 나간 나는 그와 첫 대면을 하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한 국가의 장관이란 인사의 차림새가 너무나 엉뚱하고 제멋대로였던 것이다.

 

공항에 착륙한 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관이란 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