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5/03/02
아랍 수리조선소는 건설 당시 김성중 과장이 입사 이후 8번째로 근무한 현장이었다. 이 현장이 중요했던 것은 현대건설이 중동에서 수행한 최초의 대규모 공사이자,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있게 한 모태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열사의 나라에 첫 진출한 현장인 만큼 시행착오도 많았다며 30여 년 전 기억을 더듬는 그의 시선 속에는 즐거운 추억을 곱씹는 듯한 천진한 행복감이 깃들어 있었다.
“1975년 10월에 착공한 아랍 수리조선소는 현대건설이 중동 지역에 처음 진출한 현장이었습니다. 덕분에 공사 초기에는 처음 겪는 중동 기후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식수가 부족해 콜라로 양치질을 하는 일도 있었고, 합판조각 위에서 텐트를 치고 지내다 12월부터 시작된 우기로 피해를 입기도 했죠. 다행히 저는 1976년 1월에 바레인에 도착을 했는데, 그때는 이미 우물을 파서 식수도 해결하고, 숙소도 완공되는 등 예비공사가 어느 정도 끝난 후였습니다.”
바레인은 페르시아만 서안에 자리 잡은 섬나라다. 아랍 수리조선소는 바레인섬에서도 8㎞ 가량 떨어진 매립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다 한 가운데서 진행된 공사였던 만큼 자재 수송부터 통신시설까지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가장 애를 먹은 것은 자연환경에 따른 골재 문제였다. 바레인 내륙지방의 석산에서 가져온 암석들은 석회질 성분이라 물을 머금으면 곧 흐물흐물해져 버렸고, 바다에서 퍼 올린 모래에는 이물질이 많아 샌드스크루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 했다. 또한 모래와 개흙으로 이뤄진 매립지다보니 파일을 박는 일도 어려웠을 뿐더러, 드라이도크에 배근한 철근들은 몇 시간 뒤면 바로 녹이 슬 정도로 습도가 높았다. 이처럼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니 초기 공정은 한없이 늦어지고 출혈도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힘들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사우디·쿠웨이트·UAE·카타르·바레인·이라크·리비아 등 7개 국가로 구성된 OAPEC에서 발주한 공사였던 만큼 중동 전 지역에 대한민국의 저력을 보일 수 있는, 국가 이미지가 달린 중요한 공사였거든요. 때문에 직원이나 기능공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어려운 공정을 극복했습니다. 공기를 맞추기 위해 철야작업은 물론이고, 오링거 머신을 사용한 새로운 파일공법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적용하는 등 1977년 5월 예정대로 담수식을 진행하기 위해 모두가 초비상 상태로 근무할 수밖에 없었죠.”
울산조선소를 통해 조선소 공사의 충분한 경험을 쌓은 후였지만 외국의 엄격한 기준과 규격을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는 특별했다. 품질관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당시 한국 건설문화 풍토에서 영국과 포르투갈로 이원화된 까다로운 감독은 다소 억지처럼 여겨질 때도 많았다. “감독관들이 자국 자재를 사용하게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처음엔 공기를 맞추느라 그들의 요구를 따랐지만 나중에는 3~4개월 전부터 우리나라 자재들을 추천해서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죠. 특히 해수공사에 사용하는 5종 시멘트의 경우, 단양에서 가져와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영국 기술회사는 시멘트클링커 공장에 감독관을 상주시키고 매일 시멘트 품질을 검사했는데 단 하루도 불합격 판정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덕분에 우리나라 시멘트의 우수성이 알려지면서 나중에는 현지 업체들까지 시멘트를 사기 위해 줄을 서기도 했죠.” 힘든 공사였던 만큼 회사의 대우도 남달랐다. 최고의 대우를 해주라는 정주영 회장의 특별 지시로 물자수송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먹을 것만은 항상 풍족했다.
“식당에는 연일 귀한 바나나, 통닭 등이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뷔페 문화가 없을 때라 양을 통제 못해서 탈이 나는 직원도 많았습니다. 해외 감독관들도 우리 식당을 부러워할 정도여서 같이 식사를 하며 친분을 쌓기도 했죠. 하루는 회장님이 현장에 오셔서 40℃가 넘는 고온에서 땀이 범벅이 된 채 40㎏짜리 시멘트 포대를 일일이 뜯어가며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기능공을 10분간 보고 계시더라고요.
그리고는 저 사람들이 이 현장에서 가장 고생하는 것 같다며 임금도 많이 주고 잘 먹이라고 신신당부를 하셨지요. 직원들을 혹독하게 독려하던 호랑이 회장님이었지만 인정만은 남다르신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이 소중했던 현장이기 때문이었을까, 김성중 과장으로서는 현장에서의 고된 철야작업보다는 모처럼 맞은 명절 직원들과 시내에 나가 마시던 술 한 잔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