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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산업] 월남땅에 건설의 첫삽을 꽂고, 필자 이재준氏

등록일 : 2015/03/16

나는 평소 모든 일에는 시기와 진리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무리하게 억지를 부리거나 타이밍이 적절치 못하면 일을 그르치기가 쉽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가 좁은 국내시장에서 탈피, 이국땅에 건설의 첫 삽을 꽂고「불도우저」의 굉음을 울리기 시작한 1966년이야말로 해외건설의 지평을 여는 적절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일찍이 우리나라 건설업계는 6·25 동란을 전후하여 주한 UN군에 대한 건설군납을 통해서 미8군 주택, 비행장, 항만, 군시설물 공사를 하여 외화획득은 물론 선진건설 기술과 수주 및 기계화 시공능력을 높여 왔으며, 여기에다가 제 1차 경제개발기간 중에 발주 사회간접자본 공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해외진출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건설업은 물적 생산시설, 또는 그 기초시설제공 활동에서 발생되는 「서비스업」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수출과는 무관한 것으로 이해되어 건설업의 해외진출이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였다. 그 이태전인 1964년에는 우리나라 총 수출실적이 1억불을 돌파했다고 해서 온 나라 안이 떠들썩할 지경이었으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시기에 해외에서 공사를 수주했으니 분명 뉴스거리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66년 2월 7일자 「산업경제신문」은 「매월 20만불 획득」이라는 표제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해외건설개척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우리나라 건설업계에서 건국 후 최초로 건설공사에 의한 외화 획득의 실적을 기록케 함으로써 해외진출업자들은 물론 국내업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7일 관계소식통에 의하면 동남아 시장 개척의 2번 타자로써 월남에서 「퀴논」항을 비롯한 5개 항구의 항만 항타공사를 도급한 바 있는 대림산업은 제 1차 공사 착수금으로 4만 5천불의 공사비를 받아 한은에 송금함으로써 건설공사 관계로서는 우리나라 외화 획득 제 1호의 기록을 남겼다 한다.

 

주월 미국건설회사인 RMK-BR와의 청부계약에 의해 오는 3월말부터 착공할 예정인 이 항만 항타공사의 연간공사비는 약 2백만불에 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공사만 착수하면 매월 약 20만불의 외화 획득이 가능할 것이라 한다.』

또한 동년 3월 9일자 「서울경제신문」은 「유황도 공사 맡게 돼」라는 표제 하에,『 ‘66년도 해외진출업자지원책이 경제각의에서 통과된 후 우리나라 건설업자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 8일 건설부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지난 2일 미 극동지구 군사공병단이 일본주재사령부에서 집행한 유황도 해중유조탱크 및 앤커 설치공사 국제입찰에서 우리나라 대림산업은 일본의 동아항만 등 4개사를 물리치고 적정가인 11만 5천달러 투찰로 낙찰, 7일 정식 도급계약을 맺었다.

 

해외진출 제 4호를 장식할 이 공사에서 일본의 큼직한 회사와 맞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자재일체가 관급이기 때문에 전체 공사비와 노임조의 가득량이 될 뿐 더러 특히 계속공사로써 앞으로 5백만달러 상당의 공사가 남아있는데 흥미를 돋우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해외건설 초창기 우리 건설업계 사정을 ‘66년 2월 9일자 「산업경제신문」은 「건설업 진출계획을 촉구, 동남아는 유망한 시장」이라는 논평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해 놓고 있었다.

 

『건설업계 소식통들은 현재 막대한 공사가 발주되고 있는 월남이야말로 우리나라 건설업계가 진출할 수 있는 외화획득시장이라고 진단하고 ‘66년도에는 대량진출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월남공사는 대부분 군부공사이며, 또한 미군관계인 관계로 미국업자들의 공사독점 경향과 바이 아메리칸 정책의 제약 등으로 한국업자 진출은 사실상 곤란한 점이 허다하나 관·민이 일치한 노력여하에 따라서는 그러한 제약을 극복하고 능히 진출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업자들의 충실한 실력도 실력이려니와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건설업계의 시공기술은 세계수준에 도달한 지 오래이고, 해외에서도 이미 인정받은 바 있으므로 월남진출에 있어서는 하등 문제시될 바 없으나 자금면에 있어서의 뒷받침이 간절한 형편일 뿐만 아니라 시장개척을 위한 노력 등에 있어서 당국지원이 또한 아쉬웠다.

손쉬운 예로서는, 까다로운 여권수속 등을 간소화하여 현재보다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 건설업계의 견해였고, 현지에 지점 설치 및 운영을 위한 외환 조치의 적절한 대책과 아울러 업계인사가 수시 왕래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야 국제무대에서 선진국업자와 대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업계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렇듯 앞의 일간지 내용 등을 인용한 것은 우리나라 해외건설 초창기, 특히 건설업체의 월남진출을 이해하는데 객관적인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대로 여기에 옮겨 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건설업계가 해외건설에 뛰어든 계기는 주변 국제환경에 적절히 대응한 결과이기는 하나 그 보다는 우리가 가진 개척정신의 발로였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진취적이고 합리적인 프론티어 정신이 오늘의 미국을 만들었고 오대양 거친 바다를 누비던 영국인들의 투지가 대영제국 번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우리 대림 반세기의 역사도 이러한 개척정신이 그 근저에 맥맥히 흐르고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우리가 해외에서 첫 시공한 공사는 ‘66년 1월에 착공한 라짜(RACHGIA) 항만 항타공사인데, 당시 우리 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규모 선박인 「부림호」에 건설장비와 자재를 싣고 거치른 동지나해와 남지나해를 헤치며 항해하던 일을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차라리 눈물겨운 정경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늘날은 정보통신과 교통기관의 눈부신 발달로 세계를 내 집 드나들 듯 누비고 다니며 그 속사정을 어느 정도는 꿰뚫어 볼 수 있지만 불과 30년도 채 못되는 당시만 해도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한다는 일은 수많은 어려움과 불가예측적인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우선 진출 대상국의 예측할 수 없는 정국의 변화와 자연조건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하며, 게다가 전 세계 최강의 건설회사들과 수주경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굳건한 의지와 대자연에 도전하는 불굴의 투지, 미지에 대한 모험심이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했다.

 

「라짜항만 항타공사」수주 입찰 때도 우리는 사전에 아무런 정보없이 해외출장비로 달랑 200불을 들고 가서 세계 유수의 건설회사들과 당당히 겨뤄 낙찰 받은 공사이다.

 

특히, 우리가 첫 진출한 월남은 우리와는 기후나 풍습, 인종, 언어가 전혀 다른데다가 소위 「월남전」이 한창 열기를 더해가던 무렵이었다. 월남전 사상 가장 치열했다고 하는 ‘66년 6월은 우기총공세에 주월미군 약 40만명을 투입, 저 유명했던 「서치 앤드 디스트로이」작전을 전개했던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 회사의 월남진출은 얼마나 강인한 투지와 모험을 수반해야만 했던 것인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사운과 직원들의 목숨을 건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우리회사 서혈지점장과 사보 「대림」지(‘66년 1월호)와의 인터뷰 기사내용을 여기에 그대로 옮김으로써 그때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전해볼까 한다.

 

 

□ 그곳의 기후는 어떻습니까?

 

『매우 건조하고 불쾌지수가 낮기 때문에 아무리 더워도 그늘에 나가 있으면 시원하지만, 1년 열두달 4계절이 없고 열대기후이기 때문에 자주 피로해집니다.』

 

 

□ 직원들의 건강상태는?

 

『파월해서 한두 달 정도는 새로운 분위기에 익숙해지려고 정신없이 지내지만 그 뒤부터는 대부분이 소위 그 월남 병을 가볍게 앓아요. 대개 식욕이 떨어지고 밥맛이 없어지며 미열이 나는 듯 목이 마르고 골치가 아파서 의욕을 잃게 되는데 이런 경우 약을 쓰면 삼사일 혹은 일주일이면 가라앉습니다. 그러면 면역이 된 거예요. 이런 것은 몸이 건강한 사람도 다 경험한 것입니다.』

 

 

□ 의무적으로 앓는군요.

 

『의무적이지요. 다음은 마라리아인데 우리나라에서 생각하기엔 남방의 모기는 다 크리라 짐작하겠지만 우리나라 모기보다 굉장히 작아서 모기장을 쳐놓아도 망 사이로 기어들어 옵니다. 더욱이 이 남방 모기는 질이 아주 나쁘기 때문에 군대에서 키니네를 공급받아 일정기간은 꼭 예방조치를 합니다. 다행히 이 마라리아는 한국사람 체질에는 약하기 때문에 2,3일 쉬면 곧 낫게 됩니다.』

 

 

□ 사이공의 근황은 어떻습니까? 보호의 혜택 등...

 

『원래 사람도 많고 현장도 제각기 분산되어서 방위는 자기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그러니깐 셀프-디펜스(Self-defence)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런 면에서 아주 철저합니다. 특히 전선(Line)이 없는 전쟁이라서 정신적으로는 모두 불안하게들 생각합니다. 내가 아무리 설명해도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지금 우리가 얘기하는 주위에 120m/m 로켓폭탄이 떨어졌다면 실감이 날런지요.』

 

 

요사이 베트콩의 공세가 심한 것 같은데 전쟁 중 일하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까?

 

『월남인들은 이제 전쟁에 만성이 되어버렸나 봅니다. 사이공 시민들은 전쟁이란 다른 나라 군인들이 와서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하는 데에는 지장이 많습니다. 우리가 일하는 곳이 메콩 베트남인데 메콩 삼각주의 중심이 되는 곳입니다. 싸움이 붙었다 하면 물자수송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준공일이 늦어지곤 하는데 다행히 월남정부에서 그것을 이해해 주어요.』

 

 

□ 혹시 베트공들이 우리가 작업하는 시설물에 대해 파괴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고 있는 공사가 대부분 학교나 병원 같은 곳이고 보니 자신의 형제자매가 배우고, 또 부모형제들이 병이 났을 때 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별다른 피해는 받지 않았습니다.』

 

 

□ 언어장벽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까?

 

『그것이 문제지요. 언어라는 것은 생활의 한 수단인데 월남에서 일하려면 싫던 좋던 월남 말은 조금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곳 현지 노무자들에게 셰익스피어같은 영어는 별로 필요가 없어요. 브로큰 월남어라도 해서 의미소통을 해야 유익하니까 직원들에게 월남어를 배우라고 권장하지요. 요새는 제법들 해요. 간단한 말은 비록 브로큰 베트남어이지만 손짓발짓 해가며 의사소통을을 거뜬히 해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와 기후, 풍토가 다른데서 오는 고통, 고국을 멀리 떠나 객지에서 겪어야 하는 외로움, 특히 월남의 경우같이 전쟁의 와중에 휩쓸리고 있는 땅에서 공사를 수행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이중고, 삼중고를 감당해야만 했다.

 

대체로 월남전이 언제부터 발발되었으며, 어떤 형태로 전화가 불붙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정규군끼리의 충돌에 의한 전쟁이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단전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1954년 제네바협정이 조인된 이래 몇 년간은 평온했으나, ‘57년 월남에 대한 월맹의 게릴라전에 의한 침투내지 선전전이 시작되었고, 베트콩들이 출현, 살인과 방화사건이 저질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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