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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물산] 중동의 열사를 녹인 한국인의 열정

등록일 : 2015/03/02

내가 삼성건설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1년 리비아 미수라타 제철소 수주가 계기가 됐다. 포항제철에서 10여년을 근무하며 관련분야에 대해 경험을 쌓아왔던 내가 삼성건설로 자리를 옮겨 리비아 미수라타 제철소 현장으로 달려갈 결심을 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 미지의 땅에서 그동안 쌓아온 내 역량을 발휘하고 싶은 도전정신과 열정도 작용했던 것 같다. 미수라타 제철소 현장을 이끌어갈 경험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삼성건설로 자리를 옮겼을 때 수주 사실을 외부에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 국내업체들의 해외시장에서의 출혈경쟁을 막기 위해 실시하고 있던 지역할당제 때문이었다. 당시 리비아의 건설시장은 대우에 우선권이 주어져 있었기에 미수라타 제철소 공사를 수주하려면 대우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알리자 대우의 김우중 회장이 이병철 선대회장을 만나 막후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대우 김우중 회장이 이병철 선대회장에게, 대우에서 검토해보니 2000만 달러 정도 적자가 예상되는데도 공사를 꼭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병철 회장이 삼성건설에 검토를 지시했고, 이 업무가 갓 입사한 나에게 주어졌다. 두 달 가량 고생고생해서 흑자가 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만들어 올렸다. 그때가 7월이었는데 나에게 소장을 맡아 8월 15일에 착공식을 거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당시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인 때라 경험인력을 구하기 어려워 포항제철에 근무하다 민간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사람들을 스카웃하는 등 인력을 급조해 정해진 날짜에 겨우 착공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리비아 현장 사정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리비아는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로 인해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공사 대금 지불이 어려워지자 의도적으로 공기를 지연시키려 했다. 설계도면의 승인을 미루거나, 심지어는 휴일과 야간작업을 금지하기도 했다. 밤낮 없는 돌관공사로 공기를 단축해야 흑자운영을 기대할 수 있었는데 뽑아온 인력과 비싼 가격으로 구입한 장비를 반쯤 놀려야 했기에 속이 바짝바짝 타기도 했다. 인력 구하기가 어려워 인도인 근로자를 약 1000명 정도 동원했는데, 신분제도라든지 문화적 이질감에서 오는 문제로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아직도 카스트제도의 잔재가 남아 있어 신분이 서로 다른 사람들과는 잠자리는 물론 식사나 차량 탑승을 같이 할 수 없다고 해서 숙소, 식당, 화장실을 따로 마련해 주어야 할 정도였다. 그러한 불리한 작업여건 아래서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공사에 임해 4년 만에 공사를 완료했다.

 

당시 미수라타 제철소 현장에는 세계 각국의 건설업체들이 참여했는데 예정된 공기에 공사를 완료한 것은 삼성건설과 일본 고베스틸 뿐이었다. 미수라타 제철소 현장은 적자 우려를 불식시키고 28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해 회사의 자금수지 개선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우수현장으로 선정되어 명성을 날리는 등 개인적으로 보람이 컸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나는 공사의 준공을 보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동아건설이 수주해 시공하고 있던 리비아 대수로의 2차 공사 발주를 앞두고 입찰 참여 준비를 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라크 아브그라이브 고속도로 현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여파로 당초 계획보다 공기가 지연되자 현장소장을 교체해 현장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 뜻이었고 그 적임자로 내가 선택됐던 것이다. 이라크 현장도 어려움이 산재해 있었다. 이란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라크 정부의 재정이 어려워 공사가 정상적으로 진척되지도 않았고, 이란의 미사일 공격 때문에 공사를 중단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공기가 늦어지다가 준공을 앞둔 1991년 1월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현장에서 긴급 철수해야만 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갖은 시련과 공사 중단의 위기를 겪다 현장 종료를 앞에 두고 현지인에게 위임한 후 떠나야만 했던 직원들의 가슴은 참으로 쓰라렸으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돌아보면 포성 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의연할 수 있었는지, 생사를 함께 한 직원들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피보다 진한 동료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