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5/03/16
장마철답지 않게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뜨거운 햇빛이 아스팔트를 모두 녹여버릴 듯 이글거리던 1975년 7월 18일 오후 2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16층 건설부 회의실에서 건설부 장관이 주재하는 해외건설업자(당시에는 ‘건설수출업자’라고 칭하였음)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시기에 정부 주도로 열리는 해외건설업계 대표자회의는 우리 건설업체의 해외 진출을 지원, 독려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바야흐로 황금 같은 중동시장에서 국익을 최대화할 수 있도록 우리 업체끼리 과당경쟁을 하지 말고 수주 질서를 지켜달라는 정부 측의 당부와 함께 업계 애로사항을 듣고 정부 차원에서 문제점을 해결해주기 위한 일종의 전략회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해외건설촉진법의 태동
당시에는 해외건설에 대해 정부가 최대한 지원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업계에서 정부 측에 기대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이런 모임에는 업계의 관심이 크기 마련이었다. 그 날 회의에는 해외 진출업계 대표 20여 명이 참석해 여러 가지 건의와 아울러 애로사항들을 호소해 왔다. 업계 대표들이 건의한 사항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중동 산유국의 건설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이므로 우리 업체의 진출 전망이 밝고 무한정 신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재력의 한계와 정부의 지원제도 미비로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운 단계에 와 있으므로 정부의 획기적인 지원조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중동 진출의 기회를 놓쳐 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가칭 ‘건설수출진흥법’을 제정해 해외건설공사에 대한 보증을 담보 없이 발급해 주고, 앞으로 연간 10억 달러 수주를 목표로 할 때 해외건설자금으로 매년 600억 원을 지원해 주어야 한다. 상품 수출산업에 대해 정부가 1973년까지 조세감면과 금융특혜 등의 지원제도를 편 것과 같이 해외건설에 대해서도 조세를 감면해 주고 건설수출진흥특별기금을 설치해 장·단기 건설수출지원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등이었다.
이상과 같은 업계의 건의에 대한 건설부 장관의 답변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월남전 종전 후의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오일쇼크로 어려워진 우리 경제에 중동 건설시장은 크나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일실(一失)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정부와 업계 모두가 ‘한국건설주식회사’라는 거대한 조직의 같은 구성원으로서 혼연일체가 되어 지혜와 힘을 모아 전력투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연내에 기필코 해외건설 지원 관련법을 제정해 건설 진출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즉흥적으로 공언하였다.
회의에 배석했던 건설부 관계관들은 법 제정에 관한 정부의 방침이 사전에 전혀 논의된 바 없었으므로 아연실색하였다. 건설수출지원법에 대하여 공식석상에서 건의된 것은 그때가 처음으로 건설부 장관이 실무자의 의견도 들어보지 않고 즉석에서 법을 제정하겠다고 주저 없이 공언할 수 있었던 것은 업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로부터 미리 충분한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 두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그러나 장관의 즉흥적인 공언의 숨은 이야기는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튼 1975년 7월 18일 해외건설수출업자 대표자회의는 해외건설촉진법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
산발적인 지원 지침에서 한발 더 나아간 법안 작업 지시
우리의 건설 수출은 1965년부터 시작되어 해를 거듭할수록 확장되어 왔으며, 1973년 중동에 처음 진출하면서부터 괄목할 만한 신장을 하게 되었다. 당시 해외건설에 대해서는 1971년 1월에 건설업법을 개정해 해외건설업의 허가 등에 관한 몇 개 조항을 신설하여 적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구체적인 사항은 해외건설업에 관한 각종 지침이나 기준 등 그때그때 필요할 때마다 산발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규정들을 남발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중동 진출이 시작된 이후 해외건설공사의 수주량이 급격히 증대하자 정부가 이를 효율적으로 지원하고 관리하여 우리 업체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해 주는 제도적 장치 마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종래와 같이 잡다하고 산발적인 각종 지침만으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그 해 12월 3일 해외건설촉진법안이 국회건설위원회에 상정되었을 때 이 법안에 대한 건설부 장관의 제안 설명이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에 그 중 일부분을 요약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1980년대 100억 불 수출 목표 달성책의 일환으로 해외건설의 전략적 시장(중동을 지칭함)을 개척, 확보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체제를 구축하고 해외 공사의 적정 시공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증가 일로에 있는 해외건설 수출을 보다 가속적으로 촉진할 수 있도록 하고자…(중략) 최근 사우디, 이란 등 중동시장은 우리 건설업 진출의 전략적 시장으로 대두되고 있으나 이들도 점차 민족적 자각과 더불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자체의 인력 개발과 업체의 육성을 도모하고 있어 수년 후에는 독자적인 건설능력을 보유할 것이 확실시되므로 그 전에 이 지역 건설 수출의 교두보를 견고히 조성, 구축하기 위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해외건설촉진법의 제정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대충 이러한 요지였다.
아무튼 해외건설수출업자 대표자회의가 끝난 7월 18일 오후, 기획관리실장으로부터 해외건설촉진법 제정을 위한 법안 작업 지시를 받았다. 해외건설촉진법의 입안과 관련된 업무는 기획관리실장의 지시를 받아 처리하고, 추진 상황은 모두 기획관리실장에게 직접 보고할 것이며, 그 날부터 여관에 가서 철야작업을 실시해 2주일 후에 법안의 골격을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해 6월 25일부터 국토계획국에서 근무하다가 해외건설담당관실에 전보되어 왔기 때문에 해외건설분야에서 쓰는 용어의 뜻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해외건설을 지원하는 법안을 성안(成案)하라는 지시를 받자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 해외건설담당관 밑에 3명의 사무관이 있었음에도 법과대학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전입한 지 3주일 밖에 안 된 내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이었다.
그 때만 해도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작업은 주로 일본의 법률을 우리 실정에 맞게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만드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그러나 해외건설촉진법의 경우에는 그런 방법이 통하질 않았다. 일본이 모든 분야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었지만 해외건설은 일본보다 우리가 훨씬 활발했고 앞서갔기 때문에 일본에도 해외건설 지원에 관한 법제는 없었던 까닭이다. 해외에 주재하는 우리 대사관에 훈령(訓令)하여 주재국의 유사한 법제도를 조사, 보고하도록 하였으나 헛수고였다. 세계 어디에도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2주일만의 법안 골격 보고와 알맹이 빠진 반영
어떤 내용들을 어떻게 담아야 해외건설지원법이 될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 날 밤부터 사무실과 가까운 내자호텔에 방을 잡고 대한민국법령집 한질 30여 권을 몽땅 옮겨놓고 1권부터 뒤적이기 시작했다. 무역거래법 등 대외거래에 관련된 법률이나 외환관리법, 수출진흥법, 수출입은행법, 그리고 각종 산업분야별로 정부가 지원하는 시책들을 정한 각종의 ‘…진흥법’ 등을 빠짐없이 조사, 발췌하여 해외건설분야에 응용하는 방법으로 접근해 갔다.
고군분투, 악전고투 끝에 주어진 2주일 만에 법안의 기본 골격이 구성되어 입안의 기본 방향을 8월 5일 장관에게 보고하였다. 실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순간의 희열과 만족감으로 그간의 피로를 잊을 수 있었다. 후에 국회의 법안심의 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창조성이 인정되어 법안에 대한 시비가 비교적 적었다고 기억한다.
해외건설촉진법이 제정되면 이 법은 해외건설의 확대를 도모하는 지원법적 성격과 국제경쟁력 극대화를 위한 정부의 관리·감독 기능을 정하는 규제법적 성격을 동시에 갖춘 해외건설에 관한 일반법의 지위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취지에 따라 법의 초안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해외에 진출하는 건설업자를 전문화시키고 기술을 고도화하도록 유도하여 해외에서 공사를 견실하게 시공할 수 있게 능력을 제고시켰다. 대외적으로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 해외건설업을 하려는 자는 엄격한 면허기준을 갖추어 면허를 받도록 하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업체는 아예 처음부터 해외에 진출할 수 없도록 하였다.
둘째, 우리 업체끼리의 무리한 경쟁을 방지하고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업체가 해외공사의 입찰에 참여하도록 했다. 또한 우리 건설업체의 대외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매 공사 입찰 시마다 건별로 도급허가를 받아야 입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엄격히 통제했다.
입찰의 전 단계에서는 업체가 수주활동의 추진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도록 하여 수주활동이 상호 경합하는 경우에는 정부가 이에 관여해 경합을 조정해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공사를 여러 업체가 합작하여 수주하거나 또는 합작으로 시공하도록 권고할 수 있는 권능을 정부에 인정하였다.
셋째, 해외건설촉진법을 제정하자는 취지는 정부가 해외건설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우리 업체의 잠재능력을 키우고 강화하자는 것이었으므로 여러 가지 내용들이 지원제도로서 총망라되었으나 많은 부분이 입법과정에서 삭제되고 말았다. 초안에 담겼다가 삭제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해외건설업자에게 해외공사자금을 대출해주고 지급보증을 해 주도록 하기 위해 정부의 출연금, 해외건설업자의 출연금, 해외공사도급에 의한 적립금, 해외차입금 등을 재원으로 하는 해외건설진흥기금을 설치하여 운영할 수 있는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경제기획원의 강력한 반대로 삭제되었다가 후에 1980년 12월 법 개정 시에 거의 같은 내용으로 반영되었다. 그리고 매년 해외건설지원자금 소요액을 건설부 장관이 파악하여 재무부 장관에게 통보하면 재무부 장관은 신용보증기금과 수출입은행자금에 해외건설지원자금의 한도액을 충분히 반영해야 하는 의무를 규정하는 조항을 두었으나 이것은 재무부의 반대로 삭제되었다. 아울러 일반수출업자와 같이 해외건설업자에게도 조세를 감면해주는 규정을 두었으나 이 조항도 재무부의 반대로 반영되지 못하였다. 또한 해외공사의 도급허가를 받으면 그 해외건설업자는 공사 시공을 위한 근로자의 출국에 필요한 노동청(후에 노동부로 승격)의 근로자 송출 허가를 의제(擬制)하도록 규정하였으나 노동청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최초의 해외건설촉진법에는 예산의 범위 안에서 해외건설장려보조금으로 신규지역 개척자나 해외시장 조사 등의 자금을 지원할 수 있게 한 조항과 다른 법률에 의한 수출입업자와 같이 해외건설업자에 대해서도 정부가 지원하도록 하는 내용의 조항들이 삭제되어 알맹이가 빠져버린 격이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입법과정에서 재무부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법에 반영된 ‘도급허가의 통보를 받게 되면 관계기관은 이에 협조하여야 할 의무가 생기도록 한 조항’에 의해 해외건설업자들은 금융 지원 면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
한시법으로 시작해 5개월 만에 만들어진 법
해외건설촉진법은 중동지역 건설시장 진출에 최대 역점을 두어 1980년대에 100억 불 수주를 위해 단시간 내에 정부가 집중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법의 제정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법의 적용시한을 6년 정도로 보고 1981년 12월 말까지만 유효한 한시법으로 성안하였다.
한시법으로 하려던 그 당시의 여건은 그 해 9월 16일 해외건설촉진법 제정 필요성에 대해 건설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 잘 함축돼 있어서 그 보고서의 일부를 소개한다.
“…중동국가들은 점차 민족적 자각과 더불어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자체의 인력 개발에 중점을 두어 자국업체를 육성하여 대형화하고 있으며, 향후 5~6년 후에는 독자적인 건설능력을 보유할 것이 확실시되며(동남아에서의 경험), 또한 기후조건이 40도를 상회하는 건설환경 때문에 현재 선진제국의 건설업체는 인력 확보난으로 아국업체와의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이나 1980년대 1000불 소득이 실현되면 우리 업체도 현재와 같은 유리한 수주 참여가 어려울 것이 예상되므로 1981년 이전에 중동지역에서 집중 수주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여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이 한시법으로 추진한 이유는 정부가 각종 지원시책을 강구하여 특별지원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입법과정에서 해외건설진흥기금, 신용보증기금, 수출입은행자금의 지원 조항, 조세 감면 및 인력 송출, 절차 간소화 관련 조항들이 삭제됨으로써 해외건설촉진법이 해외건설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면허와 도급허가제도, 수주활동의 통제 등 해외건설활동을 번거롭게 하는 해외건설규제법이란 비난도 받게 되었다. 따라서 당초 의도와 같이 한시법으로 해야 할 필요성도 소멸되고 말았다.
하나의 법률이 제정되려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여 상당한 준비작업을 해야하기 때문에 성안(成案) 과정에서 많은 시간이 흐르기 마련이다. 정부가 제안하는 각종 행정법률인 경우에는 법이 제정되어 집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충분히 검토하고 관련 부처와의 의견 조정 등 실로 거쳐야 될 과정이 많아서 법의 내용 구성에 긴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해외건설촉진법은 그런 면에서 또 하나의 기록을 수립하였다. 입법과정에서 거쳐야 할 과정들을 건너뛰지 않고 모두 거치면서도 최대한 일정을 단축한 셈이다. 추진 과정을 요약해 보면, 1975년 7월 18일 해외건설촉진법 제정에 관한 건설부 장관의 지시가 있은 후 법에 담길 주요 골자를 중심으로 한 입법의 기본방향을 8월 5일 장관에게 보고했다. 이어 9월 5일 조문 작업이 완료되어 법령정비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마치고 ‘해외건설촉진법 제정안’을 9월 16일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았다.
또한 법안에 대하여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외무부, 보건사회부, 과학기술처, 노동청 등 관계기관과의 협의와 공화당 및 유신정우회와의 당정회의를 거쳐 10월 27일 경제장관회의 의결과 법제처 심의를 받고 11월 14일 국무회의(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개최)에서 의결되어 11월 20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법안 작업에 착수한 이래 국회에 제출되기까지 4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이후 12월 3일 건설위원회에 상정되어 전문위원의 심사와 입법 소위원회(신동광, 정광호 및 이진연 의원 등 3인으로 구성)에서의 심의를 거쳐 12월 10일 건설위원회에서 의결되었다. 12월 12일에는 법제사법위원회의 의결을 거쳤으며, 드디어 그해 12월 17일 제94회 정기국회 폐회 직전에 본회의에서 해외건설촉진법이 의결되었다. 이어 7월 18일부터 12월 17일까지 5개월간 법 제정에 관한 지시가 있은 후 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기까지 고난과 시련, 그리고 보람으로 점철된 기간이었다.
마침내 12월 31일 법률 제2855호로 공포되고 1976년 4월 1일부터 발효됨으로써 이 법은 탄생과정이 다른 법률들에 비해 초고속으로 이루어졌다. 이 법의 제정은 우리 해외건설업의 발전에 새 장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