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5/03/02
말레이시아에서 첫 번째로 시공한 빈툴루 심해항 공사는 이 지역의 실정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었고, 한때 현대건설에서는 해외공사 골치 덩어리 1호로 꼽을 정도였다. 말레이시아 대사관의 비자 발급이 지연돼 선발팀의 현장 도착이 늦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갖은 난관이 꼬리를 물고 닥쳐왔다.
이 공사 현장에는 15톤짜리 덤프트럭 32대가 필요했는데, 처음에는 인도네시아 자고라위 현장에서 쓰던 것을 투입했다. 그런데 이것들은 고철에 가까울 정도로 낡아빠진 것들이었다. 즉시 대책을 세워 새 장비를 도입하려고 했지만 말레이시아 정부로부터 수입허가를 받기가 무척 어려웠을 뿐 아니라 간신히 허가를 받고 난 후에도 통관절차가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자재 조달도 커다란 난관 중의 하나였다. 도로가 전혀 없다시피 하여 육상 수송은 불가능하였고, 공중 수송을 하자니 활주로가 없어서 대형 비행기는 이착륙을 못했다. 할 수 없이 소형경비행기를 사용하였는데, 비용은 비용대로 들고 그나마 물량이 큰 것은 옮길 수도 없었다. 이 공사는 제티 공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기술적으로도 어려운데다가 계약 후 150일 이내인 1980년 1월 말까지 마치게 되어 있어 서둘러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작업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은 것은 필요한 돌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제티 공사를 포함하여 전체 공사에는 총 35만㎥라는 엄청난 양의 돌이 필요하였다. 이를 위해 감독 측에서는 돌을 캐낼 수 있는 장소를 지정해 놓았는데 막상 그곳에 가보니 만지면 부스러지는, 돌이라기보다는 흙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경계선 근처에서야 겨우 돌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것도 작업과정에서 물이 닿기만 하면 부스러지는 사질토의 연암에 불과했다.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이것을 이용하여 수면 위 1m, 차량 2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둑을 쌓은 후에 일본에서 들여온 시트파일을 박았다.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감독들도 돌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설계를 변경, 6만㎥의 바위가 필요하던 제티를 4만㎥로 축소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국 제티는 1980년 7월 15일 계약 공기보다 5개월 반이나 지연되어 완공을 보았다. 제티 공사에 이어 시행된 방파제공사에서는 돌의 부족이 더욱 큰 문제가 되었다. 2,100m와 1,100m의 방파제를 쌓기 위해서는 모두 29만㎥의 돌이 필요했으나 현장 근처에서 최대로 구할 수 있는 양은 10만㎥에 불과했다. 나머지 19만㎥의 돌을 구하기 위해 감독 측과 여러 차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감독들도 적극적으로 뛰어다니며 암원을 찾았으나 마땅치가 않았다. 결국 현장에서 8㎞, 20㎞, 심지어는 50㎞까지 떨어진 곳에 가서 돌을 구해오기도 했다.
또 나중에는 기존의 미국업자 캠프나 사무실 근처까지 파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할 때도 있었다. 이럴 때는 인명피해가 생길까봐 소량의 폭약으로 조심스럽게 작업을 하였다. 그래도 진동에 의하여 캠프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외국인들이 쫓아 나와 집을 무너뜨릴 셈이냐고 호통을 치곤하였다. 그런데다 말레이시아에는 폭약이 귀해 바위를 캐내는 작업이 더욱 힘들었다. 비싼 값으로도 구하기가 어려워 여러 경로를 통해 겨우 구한 폭약은 요긴할 때만 조금씩 나누어 써야 했다. 폭약으로는 겉의 흙만 파내고 일단 바위가 발견되면 중장비를 동원해 긁어내거나 캐내는 방법을 썼다.
애써 돌을 구해다가 쌓아놓으면 파도가 몰아닥쳐 휩쓸어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이 공사는 11월에 시작되었는데, 이때가 이 지역의 우기로 폭풍우가 심해 평균 파고가 2~3m를 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막기 위해 5m쯤 돌을 쌓고는 그 위에 보호석을 덮고 또 돌을 쌓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
원래 시방서에는 20~50m쯤 코어석을 쌓은 후에 보호석을 깔게 되어 있었지만, 파도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남쪽 방파제는 예정보다 4개월 반 늦게, 북쪽 방파제는 6개월 정도 늦게 완공되었다. 이 공사는 원래 공종마다 지체보상금이 걸려 있었으나 바위 부족으로 인한 공기 연장 신청이 인정되어 하루 2,500달러에 달하는 보상금은 한 푼도 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추가 공사비용으로 700만 말레이시아 달러를 더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공종별 공기는 지연되었지만 전체적으로는 1981년 7월 28일 모든 공사를 마침으로써 대체로 공기를 맞출 수 있었다.
공사를 마치고 나서 얻은 교훈에 대해 당시 정은양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해외현장, 특히 육로, 항공로의 교통이 불편하다거나 매우 부족한 곳은 수주계약을 할 때 보다 신중을 기해야할 것입니다. 현지사정의 철저한 조사야말로 공사의 성패를 가늠하는 전초작업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