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5/03/02
현대건설이 방글라데시에 처음 진출한 것은 자무나 교량공사 수주 추진차 현지에 지점을 설치한 1988년 7월이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지점은 현지 정국이 어지러워지면서 공사 발주가 지연되어 일시 철수됐다가 1994년 자무나 교량 수주 상담이 재개되면서 다시 설치되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자본이 부족해 전력사업이나 교량 건설과 같은 제반 인프라 시설 확충을 위한 외국인 직접 투자를 환영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 강우지역인 아셈 지역의 폭우와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녹아 발원된 자무나 강은 방글라데시 국토를 북에서 남으로 관통해 하류에서 갠지스 강과 합류, 벵골 만으로 흐른다. 총 연장 1,500㎞에 강폭이 12㎞나 되는 이 강은 유속이 매우 빠르고 변화무쌍한 강바닥으로 인해 수로 변화를 예측할 수 없어, 강우기인 매년 6월에서 9월이면 국토의 80%가 침수되는 세계 최악의 지정학적 장애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험난한 지형의 자무나 교량공사 현장이 김기철 차장의 첫 해외현장이었다.
“자무나 교량공사는 강을 가로지르는 본 교량과 다리 양 끝에 고가도로 및 부대시설을 건설하는 공사로 100m 간격으로 50개의 교각을 건설하기 위해 대구경(직경 3.15m, 2.5m) 장대파일을 지하 82m까지 박아야 했습니다. 특히 대구경 장대파일 내부의 흙을 교란시켜 에어리프팅으로 뽑아내야 했는데 처음엔 물만 뽑아져 나오는 시행착오도 여러 번 겪어야 했습니다.”
교량 상부는 길이 4m, 무게 120~180톤의 콘크리트 조각 1,257개를 현장에서 미리 만들어 런칭 갠트리 크레인을 사용해 설치해야만 하였다. 처음에 콘크리트 조각을 만드는 작업은 현지에서 제일 큰 업체에 맡겼다.
“한 달에 70개씩 18개월 동안 만들기로 약속하고 하도급을 줬습니다. 그런데 첫 달에 4개밖에 생산하지 못해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기능공 중에는 현지 지역주민들도 많아서 다른 해외 현장의 노동자들보다 숙련도가 떨어졌습니다. 도면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고 다행히 이해한다 해도 경험이 없어서 작업 자체가 불가능 했습니다.”
일단 직영으로 전환해서 철근반장이 기능공들을 가르치면서 70개까지 끌어올렸다. 작업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해외 토픽으로 전해 듣던 방글라데시의 홍수는 대단한 것이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집 지붕이 보일락말락하게 물에 잠기고 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물 반, 사람 반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거대한 야외목욕탕이 돼 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연보다 더 힘든 극복의 대상은 현지의 사람과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의 벽이었다.
“자재를 실은 배가 항구에 도착해도 통관에서 한두 달 늦어지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될 일도 방글라데시에선 그야말로 난제였습니다. 긴급하게 철근 하나 구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하탈’(Hatal)이라고 하는 집단 파업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이는 방글라데시에서 일사불란함을 경험하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방글라데시가 영국 식민지를 경험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하탈’이라는 파업이 종종 있었는데 단결력이 대단했습니다. 24시간, 48시간 시한부 파업이 신문 공고에 뜨면 화물차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부두에 자재가 들어오면 큰 물량은 내륙운반용 배를 통해 들여오는데 물량이 적으면 육로로 운송했습니다. 한번은 정권 교체기와 맞물린 하탈에 걸려서 식량 공급이 끊기는 바람에 네덜란드 업체는 철수까지 고려했습니다. 군과 경찰력을 동원해 가까스로 보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거대한 홍수를 겪으며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전락한 방글라데시. 그들을 지배하는 자연환경은 방글라데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무나 교량은 방글라데시 개국 이후 최대의 국가 기간공사로서 동서로 연결하는 첫 번째 교량이며, 4차로 자동차용 도로 외에 폭 1m의 협궤철도와 송전탑, 가스관, 전화선 등이 설치된 다목적 교량이었다. 이 교량공사는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공사와 함께 현대건설이 세계 일류의 건설회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