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5/04/28
우리나라 해외건설업체들이 초기에 중동땅에 나가 사막 속에서 ‘검은 노다지’를 줍고 있을 때, 우리 회사는 1972년부터 진출한 말레이시아 고속화도로를 시공하면서 그 북새통을 예의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연히 구경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남들이 다 나서는 노다지판이라도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삼부 특유의 경영철학으로 그 시장의 실체를 파악하기까지 의연히 기다리는 전략을 택했다.
지하발전소 공사 수주의 험난했던 여정
‘사막의 검은 노다지’가 그 실체를 드러내기까지 3~4년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비교적 위험부담이 적은 동남아로 진출해 말레이시아에 거점을 확보했다. 이곳에서의 성공을 토대로 1976년에는 같은 동남아 국가인 네팔로 시장을 확대했고, 1977년에야 비로소 중동시장을 탐색하게 되었다.
1976년 12월 네팔의 쿨레카니 수력발전소 공사에 응찰해 1977년 8월 계약을 체결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국제입찰에 붙여진 이 대형 댐 공사의 입찰에 응한 회사는 일본의 하자마구미(間組)와 삼부토건, 두 회사뿐이었다.
공사의 컨설턴트 엔지니어링을 맡은 회사는 일본공영(日本工營)이었다. 일본공영은 일제 강점기 때 압록강 수풍댐을 비롯해 해방 이후에 소양댐, 안동댐 등 국내의 수많은 댐 공사에 참여해 우리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진 회사였다. 게다가 안동댐, 남강댐 공사에서 우리와 카운트파트너로 같이 땀 흘린 지난날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일본공영은 자국 회사인 하자마구미에 여러 가지 유리한 영향을 끼쳤다. 공사비 일부에 일본 자금이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 외무대신이 네팔을 방문하는 등 정치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데, 이 모든 것이 하자마구미 쪽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히말라야의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고 완공한 쿨레카니댐 전경]
우리에게도 약점이 많았다. 쿨레카니댐은 단순한 댐 공사가 아니었다. 엄청난 길이의 도수(道水) 터널을 시공하고 지하 암반에 거대한 공동(空洞)을 만들어 그 속에 발전소를 건설해야 하는 특이한 공사였다. 우리는 댐 공사는 많이 해봤으나 지하 대공동(大空洞) 건설의 경험은 없었다. 일본 측은 바로 그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우리가 공법을 제시할 때마다 “그런 공법으로는 안 된다”고 거절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발주국인 네팔은 공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공사금액을 어찌하면 많이 깎을 수 있느냐에 관심이 있었다. 여기에다 우리 쪽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공사비 경쟁에서 일본이 우리를 따를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달러로 입찰에 응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네팔당국이 현명한 선택을 했다. 지하공동(地下空洞) 시공에는 일본의 기술 지도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우리 회사에게 시공을 맡겼다. 세계의 지붕인 설산 히말라야의 산허리에서 상상을 초월한 험난한 조건을 극복하며 삼부혼(三扶魂)을 심어나가는 고된 작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규모 공사
인도 북부에 위치한 네팔은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산으로 대표되는 히말라야 산맥이 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는 산악 국가이다. 기후는 건기(10~4월)와 우기(5~9월)로 구분되는데, 쿨레카니(Kulekhani)강 유역의 연간 강우량 중 80%가 우기에 집중되어 홍수와 한해(旱害)가 되풀이되곤 한다.
특히 이 나라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어 해안선을 갖지 못한 내륙국이며, 북쪽으로 접한 중국과의 사이에는 히말라야산맥이 교통을 가로막고 있다. 결국 모든 무역이 인도를 거쳐야만 하므로 국가적 지리 조건으로는 가히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네팔은 가장 기본적 기간설비인 전력까지도 인도에 의지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 미국·영국·서독·일본 등이 대규모 자본을 앞세우고 들어와 네팔 곳곳에서 개발 사업을 벌여나갔다.
1976년부터 네팔정부는 IBRD 차관사업으로 인도 국경 부근 바이라와(Bhairahawa)에 시설용량 15만kW의 간다키(Gandaki) 발전소와 수도 카트만두의 남서쪽 약 30km 지점에 시설용량 6만kW의 쿨레카니 수력발전소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간다키발전소는 당초 1978년에 발전에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건설을 맡은 인도 측의 사정으로 1980년에야 준공되었다. 그러나 간다키 발전소의 발전용량으로도 네팔의 부족한 전력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네팔정부는 물론 국민도 쿨레카니 발전소의 준공을 학수고대하는 실정이었다.
쿨레카니댐과 지하발전소 건설 공사는 쿨레카니강을 거대한 댐으로 막고 약 6km에 달하는 도수터널(Headrace Tunnel)을 통해 높은 화강암 산 밑을 관통시켜 유로(流路)를 변경한 후, 그곳에서부터 수압관로(Penstock Line)를 따라 표고 916m 지점까지 강물을 떨어뜨려 지하 수력발전소에 낙차를 주는 공사였다. 그러면 약 550m의 낙차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었다.
공사하기가 극히 어려운 상황임에도 이처럼 굳이 지하에 거대한 공동(空洞)을 만들어 발전소를 설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낙차를 유도하기에 불리한 지형적인 조건을 극복하고, 쿨레카니 지하발전소의 발전에 이용된 물이 다시 제2, 제3의 발전소에 이용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공사는 지하에 공동을 만들고 그곳에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점, 그리고 유로 변경을 위해 약 6km에 달하는 장대한 도수터널 등을 건설한다는 점에서 댐공사 역사상 극히 특이한 경우였다. 그뿐만 아니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일본해외경제협력기금(OECF)·쿠웨이트기금(Kuwait Fund for Arab Economic Development)·유럽경제기구(EEC)·석유수출국기구(OPEC) 등 전 세계에 걸친 국제적 금융기관들이 협동융자로 약 1억 달러의 건설자금을 투자했다는 사실 또한 처음부터 세계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극한의 현지 여건과 숱한 난관 극복
1977년 8월 14일 부사장 이하 임직원 일부 제1진이 네팔에 도착했다. 이들은 식량꾸러미를 조달받은 후 거머리가 지천으로 깔린 숲을 헤치며 시공 측량을 시작했다. 이어 카트만두지사가 설치되어 현장 지원 태세를 갖추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이도권(李道權) 소장이 부임했다.
현장 여건은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현지에서는 공사에 필요한 인력·자재·장비는 고사하고 당장 먹을 식량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긴급하게 수입한 자재와 장비가 인도 캘커타항에 처음 도착한 것이 1977년 9월 1일이었으나 그 수송이 난감했다. 인도의 고속도로가 교통 통과 하중을 8톤으로 제한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중기를 완전히 분해하여 운반해야 했고, 이 때문에 캘커타항에서 현장까지 950km나 되는 길을 수도 없이 왕복해야 했다. 또한 자재나 장비가 인도를 통과 하는 데 일주일 정도가 소요되었는데 육로 수송 도중에 시멘트의 유실(포당 5% 정도), 장비의 부속 및 윤활유 유실 등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여 울화통이 터지게 했다. 말로만 듣던 인도인들의 못된 행패를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식료품 수송과 현장 운영을 위한 관리 통로로 카트만두에서 현장까지 산길이 놓였는데 워낙 경사가 급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사이를 오르내릴 때면 아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현장까지 들어오는 진입로 공사는 현지의 국영 건설업체가 시공했다. 그들은 공기가 늦어져도 하등 상관없다는 듯 원시적인 농기구만을 가지고 느긋하게 일하는 ‘개미군단’이었다. 진입로는 사리도로 건설되었는데 소요되는 골재는 인근에서 채취한 암석이나 호박돌을 소위 ‘인간 크랏셔’인 현지 인부들이 길가에 조잡한 천막을 치고 수개월씩 노숙하면서 망치로 잘게 깨서 사용했다. 거의 2년이나 걸려 준공되었으나, 그마저도 비만 오면 무너지는 통에 현장의 식료품 조달마저 끊어질 때가 잦았다.
네팔인들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체력이 약해서 한국인 장정 한 사람이 들 만한 물건을 서너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보다 훨씬 더 나쁜 여건에서 일하면서도 깊은 신앙심 속에서 불평하는 법이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현실에 만족하며 살았다.
정작 문제는 우리 기능공들이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기업들의 해외건설이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라 기능인력 부족이 심각한 형편이었다. 업체들 사이에 구인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기능공의 노임이 턱없이 인상되는 부작용이 뒤따랐다. 이 같은 풍조 속에서 기능공들은 해외에 나가면 융숭한 대접을 받고 떼돈을 번다는 그릇된 인식을 하던 터라 현지의 열악한 상황을 접하자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을 설득시키는 일 또한 현장직원들에게 중요한 업무였다.
고비고비 어려웠던 본댐의 축조 공사
시공은 준비공사, 가(假) 배수로 및 물막이 축조, 본 댐 및 여수로·도수로·수압철관로·방수로 건설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동시에 지하발전소 건설 공사가 추진되었다. 쿨레카니댐의 구조는 존 필(Zone Fill) 방식으로 댐의 높이가 114m, 길이가 406m, 체적이 458만㎥에 이르는 대규모 댐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동안 국내에서 건설되었던 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댐을 쌓는 데는 그다지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장비와 자재 반입, 인력 투입 등 공사를 준비하는 과정이 정작 힘들었다. 아울러 초기에 현장사무실과 숙소 등 부대시설을 갖추지 못해 반년이 넘도록 천막생활을 했던 점과 보급품 부족, 고지대의 습한 기후 등이 애로사항이었다. 특히 습한 기후 때문에 직원들이 자주 배앓이를 했는데, 이를 막기 위해 숙소 침대 밑에 100촉짜리 전구를 설치해 습기를 차단했다.
간이천막 속에서 숙식하는 가운데 1977년 9월부터 측량과 함께 준비공사가 시작되어 합숙소, 사무실, 창고와 급수·동력·전력·통신설비 등을 설치하고 총연장 22.5km의 작업도로를 건설하였다. 이어 강물의 유로를 가배수로로 돌려놓기 위한 가배수로 및 물막이 댐 축조공사에 들어갔는데, 이는 본 댐 공사를 하기위한 첫 단계 공사였다. 그때까지 쿨레카니강이 가장 많이 불어났던 표고 1,459m를 기준으로 삼아 가물막이 댐의 높이를 35m로 하고 가배수로는 내경(內徑) 5m, 길이 400m의 원형 터널 2개를 뚫었다. 원형 터널은 전단면 굴착공법으로 2개 터널의 상하 양쪽 입구에서 동시에 시공했으며, 가물막이 댐은 1979년 2월 초, 가배수로 통수식과 동시에 체절(締切)과 기초 굴착을 시작하여 3개월 만에 완공시켰다.
본 댐의 축조는 네팔 수상이 참석한 가운데 1978년 4월 3일 댐 제정(提頂; Crest)의 기초 굴착 발파를 신호탄으로 시작되어 기초처리, 성토공사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기초 굴착량은 총 70만㎥로 불도저와 인력으로 시공하고 단단한 암질을 만나면 발파하여 처리해 나갔다. 기초처리공사를 거쳐 콤팩트 및 진동롤러, 불도저를 이용해 축조에 들어갔는데 재료는 토취장과 굴착토를 유용하였다. 본댐 축조 공사는 1981년 6월 9일 담수식을 끝으로 3년 2개월 만에 매듭지어졌다.
여수로 공사는 상부 저수지·방수로·Plunge Pool로 구분하여 시공했는데, 1978년 5월 1일에 착공하여 38개월 만인 1981년 6월 30일에 완공하였다. 전체 굴착량의 85%인 65만㎥가 암석이었는데 벤치컷 공법으로 진행했다. 최대의 난공사였던 도수터널 공사는 1978년 4월 1일 취수구를 굴착하면서 시작되어 1982년 1월 15일 그라우팅 공사를 마지막으로 완공된 수로 공사의 부분 공사였다. 직경 2.5m, 연장 6224m의 원형인 도수터널은 취수구로부터 약 2km 떨어진 지점의 지류 취수를 위해 설치되었다. 높이 102m의 수갱(竪坑)을 굴착하고 터널의 반대쪽 끝에 높이 92m의 조압수조를 설치하여 그곳에서 길이 213m의 수평 철관터널에 연결시켰다. 수평 철관터널은 밸브하우스를 경유하여 길이 854m, 평균 경사 23도의 지상 경사 수압관로(Penstock Line)로 이어져 550m의 낙차를 얻고 다시 길이 271m, 경사 48도의 지하 경사터널(Inclined Tunnel)을 지나 지하발전소 발전터빈에 다다르게 했다. 이때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도수터널의 중간에 총 길이가 819m나 되는 3개의 작업횡갱을 중간에서도 굴착해 들어갔는데, 제1횡갱과 제2횡갱 사이의 중간 구간은 산의 심층부를 통과했기 때문에 분리작업을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작업도로의 연장이 22.5km에 달했기 때문에 이 도수터널 공사가 전체 공기를 좌우할 만큼 난공사가 되었다.
댐 현장과 발전소 현장은 거의 20km나 떨어져 있었는데, 이 두 현장을 카트만두지점이 지원하였다. 공사 초기 현장의 분위기는 공기 준수는 고사하고 ‘과연 공사를 무사히 준공할 수나 있을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최용성(崔龍成) 이사가 부소장으로 부임하였고, 부장급 인사 교체가 계속되던 1979년 2월 이도권 전무가 카트만두지점장으로 옮겨가고 유진석 전무가 새로운 소장으로 부임해 왔다. 유진석 소장은 안동댐 건설 공사에 참여하는 등 댐 공사에 관한 한 전문가였으나 이미 삼부토건을 퇴직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다시 입사시켜 현장에 파견해야 할 만큼 네팔 현장의 상황은 긴박했다. 실제로 착공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현장에는 합숙소 등 기초시설물의 설치만 겨우 끝난 상태였다.
유진석 소장은 석산 부근에 설치해 두었던 대형 자재창고를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고, 공사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작았던 배처 플랜트(Batcher Plant)를 큰 것으로 구입하는 등 현장여건을 개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현장실무에 밝았던 후임 소장은 진행 중인 석산을 과감히 폐기하고 벤치컷 공법으로 중력을 이용하여 개발할 수 있는 신규 석산을 다시 개발해 공기 및 공사비 절감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처럼 현장의 분위기가 바뀌자 직원들의 의식도 긍정적으로 변화하며 사기가 올라갔다.
목숨 걸고 매달린 지하발전소 건설
공사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지하발전소 건설이었다. 대체로 지하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방위 및 안보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거나 기후 등 환경여건이 나빠 지상에 발전소를 세우기 곤란할 경우, 또는 지상에서 발전소 터빈을 돌릴 정도의 충분한 낙차를 얻기 어려운 경우이다. 네팔 쿨레카니 제1발전소를 지하에 건설한 이유는 바로 충분한 낙차를 얻기 위해서였다.
공사의 요지는 지하 약 300m 지점에 넓이 17.5m×50m, 높이 33.45m의 거대한 공동을 만들어 그곳에 지하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입찰 과정에서 일본측이 삼부토건의 경험 부족을 약점으로 지적했던 바로 그 공사였다. 실제로 한국의 지형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공사였기에 삼부토건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지 않고 그저 사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