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5/04/28
2011년 연초부터 시작된 튀니지의 재스민혁명과 이집트 민주화혁명의 여파가 리비아까지 삽시간에 확산되리라고는 정말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1969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카다피 정권의 42년 철권통치가 종말을 맞기까지는 옛날 왕정시대 수도였던 벵가지에서 무장 봉기가 발생한 후 불과 7개월여가 걸렸을 뿐이다. 결국 카다피는 자신의 고향인 Sirte에서 그 옛날 자신의 부하였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당시 대우건설은 리비아 내 7개 사업장에서 한국인 269명을 포함한 3국인까지 총 3천여 명이 근무 중이었다. 현지에 진출한 한국기업들 중에서 가장 많은 공사 현장과 다수의 인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구정 연휴가 끝나고 사태 발생 초기인 2월 21일부터 우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수도인 트리폴리에 있는 지사와 나머지 7개 공사현장과의 24시간 통신 채널을 확보했다. 본사에도 ‘비상대책상황실’을 설치해 현지와 24시간 통신하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였다.
전 현장의 현재 인원 파악, 철수 루트 점검 및 현지정부 동향 파악 등 말 그대로 비상대책상황실은 전시작전통제본부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현지 Operation을 총괄하기 위해 주(駐) 리비아 조대식 대사와 함께 2월 22일 새벽에 리비아 트리폴리 현지로 급파되었다.
내전의 한복판에서 4차에 걸쳐 철수
예상은 했지만 리비아로 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이미 사태 초기부터 미국, 유럽 등 서방국가들은 자국민 보호와 철수를 위해 발 빠르게 항공기와 선박을 투입했다. 이로 인해 공항과 항구는 외국인들과 이에 편승하려는 현지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신규 부임하는 조대식 대사와 나는 우여곡절 끝에 튀니지를 경유하여 가까스로 리비아 현지에 도착했다. 우리 정부를 대표하는 대사가 현지에 도착하자 그동안 불안에 떨어왔던 주재원과 교민들도 안정과 질서를 찾기 시작했고, 정확한 상황 판단 하에 전체적인 철수 계획을 수립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당사는 현지 직원들과 본사 비상대책상황실 간의 유기적인 협조 하에 4차에 걸쳐 항공편과 선박을 이용한 해상 철수를 완벽히 수행해갔다. 특히 마지막에 튀니지를 통한 육상 철수 시에는 치열한 내전의 한복판에서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대사관과 현지정부의 협조 하에 전체 인력들이 모두 안전하게 튀니지 국경을 통과하여 철수할 수 있었다.
우선 처음으로 대규모 인력을 철수시킨 1차 해상 철수 시, 당사는 2월 26일 국토해양부의 리비아 건설근로자 긴급 철수 권고에 따라 현지 필수인력을 제외한 한국인 포함 총 2700여 명의 인력들을 페리선 세 척에 나눠 태워 그리스 크레타섬으로 대피시켰다. 초기 철수 계획 수립 시에는 대상 국가로 인근 이집트나 튀니지를 우선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미 이들 국가의 국경과 항구는 리비아에서 철수한 자국 국민들과 아프리카국가 인력들로 극심한 혼란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국경을 통과하더라도 일종의 전쟁난민들을 수용하는 시설에 격리되어 자국으로 쉽게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철수 최종 목적지로 의견을 타진했던 대부분의 국가들이 3국 인력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방글라데시 국적 인력들의 이탈과 그로 인한 불법체류를 염려하여 입국을 불허했다. 특히 철수 선박의 도착지였던 그리스는 자국 내 15만 명에 달하는 불법이민자(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출신 등) 문제 때문에 사태 초기부터 그리스 주재 태국대사관과 방글라데시 공관에 리비아 철수 인력들의 자국 입국을 불허한다는 외교공문을 발송해 놓은 상태였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외교통상부는 그리스 주재 한국대사관을 통해 긴박한 우리의 입장을 수차례에 걸쳐 주재국 정부에 설명하였다. 설득을 거듭한 끝에 결국 최종 도착지를 크레타섬의 하니야항으로 변경한다는 조건 하에 입국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5개국에 이르는 3국 인력들의 주재국 공관을 일일이 접촉하여 자국 인력들이 크레타섬에 도착하는 즉시 한 명의 이탈자도 없이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협조 요청하였다. 민간업체 혼자서는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나, 현지 대사관의 장태신 대사를 비롯한 직원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이 지면을 빌어 그분들께 대우건설 임직원들을 대표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한다.
[리방사태를 맞아 본사에 비상대책상황실을 설치해 현지 동향을 파악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연합해군을 설득해 탈출 작전 감행
2차 철수 때는 리비아 내 잔류 인력 중 벵가지 현장의 필수인력만 남기고 총 235명을 철수시킬 목적으로 선박을 임차하여 벵가지항에서 일부 인력을 승선시킨 후 미수라타항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미수라타 지역은 리비아정부군과 시민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인근 해역은 다국적군 연합해군에 의해 봉쇄된 상태였다. 연합해군은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민간 선박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미수라타 근해에 도착한 철수 선박은 다국적군 해군의 입항 금지 지시를 받고 이미 부두에서 승선 대기 중이던 우리 직원들을 눈앞에 두고 배를 돌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위기상황을 파악한 외교통상부에서는 긴급히 주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에 전통을 보내 나폴리에 주둔하고 있던 연합해군사령부를 접촉하여 우리 철수 선박이 미수라타항에 입항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당시 이탈리아 현지 시간이 주말 새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속하게 연합해군사령부를 접촉해 선박의 입항 허가를 받아주어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미수라타항에서 잔여 인력을 승선시킨 후 몰타로 철수할 수 있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도와주셨던 주 이탈리아 한국대사관의 김영석 대사와 그 직원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외교부의 신속한 조처로 봉쇄 상태였던 미수라타항에 철수 선박을 입항시켜 대기하고 있던 근로자들을 태워 철수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상황을 돌이켜보면 매 순간마다 위급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고 위기상황이 아니었던 때가 없었던 듯하다. 리비아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3천여 명의 우리 직원들을 아무런 사고 없이 철수시키는 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를 돌아보더라도 이처럼 대규모 인력을 전쟁 중인 나라에서 무사히 철수시킨 예는 흔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2700여 명에 달하는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등 3국 인력들을 아무런 차별과 조건 없이 고국까지 전세기를 동원해 철수시킨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인간적이고 생명을 중요시한 인본주의적인 조치였다. 국제단체와 언론들은 당사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두고 “한국은 친구를 버리지 않았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3국 인력들도 전세기까지 동원해 동반 철수
지금 이 순간에도 수도인 트리폴리를 비롯한 리비아 현지에서 당사 한국인 직원 18명과 38명의 3국인 직원들은 발주처와의 약속을 지키고 우리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리비아 사태 초기부터 지금까지 인도적인 차원에서 철수하지 않고 현지에서 벵가지 중앙병원의 운영과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있는 3명의 당사 직원과 31명의 3국인 직원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현 임시정부의 최고 행정수반인 무스타파 압둘 잘릴 국가과도위원회 최고의장은 작년 11월 10일 벵가지 중앙병원 O&M 현장을 방문해 리비아사태 기간 중 당사의 봉사와 헌신에 대해 치하하고 감사패를 전달한 바 있다.
[위기상황에서도 벵가지 중앙병원에서 소임을 다한 대우건설에 감사패를 전달 한 무스타파 압둘 잘릴 국가과도위원회 최고의장]
한국 건설기업들은 어려운 국내 건설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해외사업을 더욱더 확장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우리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그리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상황과 맞닥뜨리곤 한다. 이러한 순간에 현지의 정확한 상황 판단과 본사와의 긴밀한 협조와 지원을 통해 민첩하게 대응한다면 극복하지 못 할 상황이란 없을 것이다.
지난 리비아사태를 돌아보자니 새삼 정부 관계자들과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표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해외사업을 하는 데 있어 아무리 어려운 시련에 마주치더라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되었다. 대우건설 가족을 비롯해 고마운 분들을 한 분씩 다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일을 통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 바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대우건설은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