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일 : 2015/03/03
대우의 해외건설이 본격화 된 후 해외에서 근무하는 대우인들 사이에서는 고생했다는 말을 토로하는 것을 공공연히 금기로 여겼다. 그만한 고생은 대우인이면 누구나 경험한 것이어서 결코 자랑스러울 것이 못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외 경험을 가졌던 직원이 한 곳에 모이면 자연히 현지에서 고생하던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었다. 이야기 중에 특히 수단 진출 사례는 결코 빠질 수 없는 단골소재였다.
1976년 초, 대우의 해외지사 정보망은 수단의 고위관리가 방한을 희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대우는 비밀리에 그를 초청해 수단에 대한 상거래와 수교를 트는 포괄적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수단은 군정이 들어서면서 외국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한편, 아랍제국, 소련, 중국 공산당 등 사회주의 국가와 경제관계를 강화하고 있었고, 이미 소련과 중공을 등에 업은 북한이 상당수의 기술자를 파견하고 있었다. 이런 지역에 한국 공관을 세우고 경제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은 당시로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렇다고 건설업체로서는 후발주자였던 대우개발이 사우디아라비아 등 기존 건설시장에 진출해 급격한 성장을 하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김우중 회장은 미지의 시장을 개척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판단으로 정부와의 연합전선으로 미지의 북아프리카에 본격 진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모험심과 개척정신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도저히 성공을 거둘 수 없는 사업이었다.
이에 따라 민병권 무임소 장관을 단장, 윤석헌 프랑스 대사를 부단장으로 하는 30여 명의 상단이 결성됐다. 상단은 1976년 4월 중순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에 집결해 수단 진출 계획을 수립한 다음, 홍해 상공을 지나 4월 19일 수단에 입국했다. 입국은 했지만 상단을 맞는 수단 측의 기본적인 태도는 적당한 명분을 내걸어 상단을 내?는 것이었다.
4월 22일 상단이 머물고 있는 영빈관에서 수단 측의 장관급 3명과 가든파티가 열렸다. 사실 이들 3명은 적당한 구실을 붙여 상단을 국경선 밖으로 내보내라는 누메이리 대통령의 밀명을 띠고 있었다.
기회는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김우중 회장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날 무렵까지도 이렇다 할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김우중 회장은 우선 딱딱한 분위기부터 풀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러자면 우리 보따리를 먼저 털어 놓아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어려운 문제는 제쳐 놓고 두 나라 사이에 이익이 되는 것부터 해결해 나가자고 전제한 김우중 회장은 상단이 수립한 계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상단의 계획은 수단에서 못 팔고 있는 원면을 한국 측이 구입하고, 대우는 홍해 연변의 위락시설?철도시설?방직공장의 건설에 참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 영사관계를 수립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사업도 사업이지만 수단과 외교를 맺으려는 우리 정부의 의지는 더 큰 것이었다. 김 회장은 사업적으로는 설사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수단과 외교관계가 이뤄지기를 바랬다.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으나 결과는 미지수였다. 수단 측은 아무 언질이 없이 돌아간 것이다.
김우중 회장의 단독 플레이에 대해 정부 측 대표들은 크게 놀랐다. 결과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왜 보따리부터 털어 놓았느냐고 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수단 방문은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적극적인 접근이 외교기술 면에서는 하나의 모험일지 몰라도 적어도 수단에서는 김우중 회장의 적극전략이 주효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새운 일행은 이튿날 철수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김우중 회장은 체념하고 짐을 챙기면서 만약 수단에서 실패하면 리비아를 선택할까도 생각했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기, 대통령 궁입니다. 한국에서 온 김우중 씨 계십니까? 대통령께서 김우중 씨를 직접 접견하시겠답니다.” 그렇게 김우중 회장과 누메이리 대통령의 면담은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누메이리 대통령은 귀빈을 놓칠 뻔 했다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면담은 진행됐다. 물론 김우중 회장은 전날 수단 장관들에게 제의했던 사업계획을 보다 상세히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이것이 효력을 발휘해 4월 24일 누메이리 대통령은 한국과 수단과의 영사관계 수립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어쨌든 그날 이후부터 김우중 회장은 누메이리 대통령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외국인이 됐다. 그것이 대우의 수단진출을 가능케 한 기본 바탕이 되었음 물론이다.
그로부터 2개월 후인 1976년 6월 말, 대우개발에서는 홍성부 상무, 이현구 차장, 류철호 대리 등 11명의 상단이 수단에 입국해 시장조사, 지사 설치 등의 일을 추진키로 했다. 그러나 대우개발의 수단진출의 새로운 난관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발생했다.
상단이 수단에 도착한 다음날 새벽, 우리는 요란한 총소리에 잠을 깼다. 묵고 있던 숙소에까지 총알이 날아왔는데, 무엇보다도 당황스러운 것은 요란한 총소리의 본질이 무엇이며 사태의 추이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전혀 몰랐다는 데 있었다. 몇 시간 후에 우리는 쿠테타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누메이리 대통령이 20일 예정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중에 발생한 이 쿠테타로 전투가 이틀 동안이나 계속됐다. 신문사 방송국은 폐쇄됐으며 공항도 봉쇄당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한 날들이 계속됐다. 사흘째 되는 날 다행스럽게도 쿠데타는 진압됐으나 그래도 정세는 불투명했다. 우리는 일단 런던으로 철수해 사태의 추이를 관망키로 했다. 일주일 후 파리로 철수했으나 그래도 사태는 낙관할 수 없어 상단은 급기야 해산되고 말았다.
수단의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한 달 후에야 진정됐으며, 대우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7월말에 수단지사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할 수 있었다.그 후 2차 서베이팀이 수단에 파견됐고, 누메이리 대통령과 접촉이 이뤄졌다. 이때 대두된 것이 수단의 영빈관 건설이었다. 누메이리 대통령이 OAU(Organization for African Unity) 회의를 앞두고 있어 영빈관 건설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론했던 것이다.
누메이리 대통령이 직접 영빈관 설계도를 가지고 설명을 했는데, 동석해 있던 홍성부 상무가 설계도에 있는 여러 오류들을 지적했다. 나름대로 설계 전문지식을 갖고 있던 홍성부 상무의 지적에 누메이리 대통령은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구체적으로 오류 부분을 지적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 김우중 회장이 수단 측의 안을 수정하는 것과 대우의 새로운 안을 다시 한 번 토의해 보자는 것을 제의해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수단 영빈관 설계 작업에 착수했다.
나는(이현구/전 부사장, 당시 국제사업부장) 그때부터 영빈관의 설계도를 들고 한 달에 세 번이나 수단을 왕래했다. 그 당시 수단을 다녀오는 데만 1주일이 걸렸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빈관 수주를 위한 초창기의 어려움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아무튼 이러한 과정을 거쳐 대우가 낸 새로운 안이 누메이리 대통령을 만족시켰고 대우가 북아프리카에 진출하는 첫 기반인 영빈관 공사를 2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