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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하면 된다’는 신념의 건설역군들, 필자 전태용氏

등록일 : 2015/04/27

현대건설이 해외에서 기록한 수많은 업적 중 특기할 만한 것으로 이란 서남부지역의 조그마한 어촌마을이었던 아쌀루에를 세계적인 가스 생산과 석유화학공업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킨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바로 이란 사우스파스(South Pars) 가스전 개발사업 2&3, 4&5단계 공사였다. 걸프만을 중심으로 동서양을 잇는 중심에 자리한 이란은 확인된 석유 매장량만도 세계 3위, 석유가스 매장량도 세계 2위에 달하는 천연자원의 보고이다. 그 중에서도 아쌀루에 인근 해저 3000m에는 그 두께가 450m로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의 넓이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가스 존이 자리 잡고 있다. 이렇듯 에너지대국인 이란의 가스전 및 유전 개발은 국가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우리 현장이 위치한 아쌀루에는 수도 테헤란에서 직선거리로 1000km 떨어진 곳으로 주도인 부쉐르까지 자동차로 4시간을 가야 하는 그야말로 오지 중의 오지였다. 1999년 공사 초기에는 한번 휴가를 가려면 새벽 3시에 버스를 타고 인근 공항까지 4시간을 달려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렇게 달려간 두바이에서도 한국행 비행기는 일주일에 두 번뿐이어서 하루 전에 현장에서 출발해야 했다.

 

그 당시 아쌀루에는 가스 자원 개발의 핵심지역으로 25단계 개발 및 관련 석유화학공단 건설이 활발히 진행 중이었다. 현대건설이 시공한 사우스파스 가스전 개발사업 2&3단계와 4&5단계 공사도 그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현대건설은 1999년 사우스파스 2&3단계 공사 착수 후 31개월 만인 2002년 Train-1의 Gas-In을 완료했다. 연이어 4&5단계는 선행 공사에 비해 공사물량이 1.5배 이상 되는 초대형 공사였으나 2002년 3월에 착공해 세계에서 가장 짧은 공사기간인 24개월 만에 Train-1의 Gas-In을 성공시켰다. 그 후 2004년 12월 30일 28개월 만에 준공해 이란은 물론 전 세계에 현대건설의 우수한 플랜트사업 수행능력을 알리며 플랜트 건설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첫 번째 시련 ‘인프라 구축’

 

현대건설이 아쌀루에에 들어가기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우스파스 가스전 개발사업 1단계 공사가 수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2,3단계에 비해 규모도 훨씬 작고 공사 진척이 부진해 공사에 참여하는 현지인들조차도 언제 공사가 끝날지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현대건설이 시공하는 2,3단계 공사 역시 현지 언론이나 이란인들의 기대가 크지 않았다.

 

우리가 가장 먼저 당면한 문제는 큰 공사를 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이었다. 큰 배가 접안할 부두가 없다보니 고깃배가 드나들던 어항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Slug Catcher Pipe를 선적한 첫 배가 들어왔으나 어민들이 어항 입구를 막아버려 배가 며칠씩 묶이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어렵게 하역장비와 인원을 동원해 자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 어민들의 대응이 강력해 여러 날을 대기하면서 보내야 했다. 공사를 수행하면서 맞은 첫 번째 시련이었다.

 

문제가 언제 해결될지 의문이었고, 해결된다 해도 부두 규모가 너무 작아 도저히 공사 진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우리는 전용 부두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3개월의 공사 끝에 바다를 매립해 전용 부두를 완성했다.

 

 

다시 찾아온 위기 ‘인력 대란’

 

이란은 그때까지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없었다. 기존 공장들은 오래 전 팔레비정권 때 지어진 것들이었다. 그래서 건설에 필요한 인력을 구하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토목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기계공사가 시작되었지만 배관공, 용접공, 기계설치공 등 전문기능인력 수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대건설은 3국인 기능인력을 동원하려 했지만, 이란정부에서는 자국민을 채용하도록 계속 강요했다. 우리는 또 한 번 공사 성패의 기로에 놓였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이란 노동부와 정면 승부를 하기로 하고 다음날 이란 주요 일간지에 대대적인 구인광고를 냈다. 일자리가 절대 부족했던 터라 이란 내에서 수많은 구직자들이 신문을 보고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우리 기술진은 내심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하고 기대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특히 가스플랜트의 핵심인 용접공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용접공이 TIG 용접 자체를 알지 못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해졌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이란 노동부에 강하게 건의해, 기능공이 없을 경우 공기지연은 물론 공사 수행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을 노동부 관계자들에게 인식시켰다. 그런 노력 끝에 3국인의 기능인력 투입을 허락받았다. 이미 선발돼 자국에서 대기 중이던 3국인 기능인력을 급히 동원해 현장에 투입했다. 한편으로 현장 내에 용접·배관·전기·컴퓨터학교를 개원해 기량이 없는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교육프로그램을 병행 실시했다. 이로써 인력 충원도 손쉽게 하고 현지인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은 결과적으로 후속공사를 연이어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현지 폭동도 ‘현대정신’으로 이겨내다

 

세계인을 놀라게 한 미국 9.11사태가 있기 전에 이란에서는 9.3사태가 발발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무더위에 시달리면서도 공기 준수를 위해 주야로 밀어붙인 끝에 시운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인 2001년 9월 3일, 문화적인 차이와 피로에 지쳐 있던 현지인들의 주도로 대규모 시위사태가 일어났다.

 

그 날은 휴일인 금요일이어서 우리는 저녁식사 후 다음 한 주간의 준비를 위해 각자 휴식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평안을 깨는 소리가 들려 왔다. 구내 도로와 얕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기거하던 현지인들이 집단으로 한국인 숙소와 3국인 숙소를 침입해 폭행, 약탈, 방화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함성과 함께 지붕과 창문으로 돌멩이 세례가 이어지자 한국인들도 밖으로 나와 그들과 대치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부상자가 나왔다.

 

인원수가 절대 부족한 우리는 현장 내 사무실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숙소에 있던 사람들은 흉기를 들고 다짜고짜 들이닥치는 그들에게 손 쓸 시간도 없이 모든 것을 빼앗겨버렸다. 속옷 바람으로 도망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장은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1만 명이 넘는 현지인들이 수차례에 걸쳐 숙소에 난입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는 세탁하려고 벗어놓은 냄새나는 양말까지 싹 쓸어갔으니 뭐가 남았겠는가? 그 당시만 해도 이란은 생활물자가 많이 부족해 우리나라의 1960년대와 비슷한 생활수준이었다. 현지인들은 한국사람이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갖고 싶어 했다.

 

우리는 절대적인 수에서 엄청나게 불리한데다 무리하게 대치할 경우 사태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일단 현장에서 떨어진 현장 사무실로 대피했다. 이미 도로는 그들에게 점령당한 터라 발주처인 토탈(TOTAL)사 차량을 얻어 타고 머리를 바짝 숙인 채 숙소를 빠져 나왔다. 다행히 현지인 전체가 적대적이지는 않아 일부 현지인들이 우리의 이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미처 차를 못 탄 사람들은 그 밤중에 걸어서 피신을 했다. 평소 출퇴근 시에는 차로 이동하여 별로 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거리였는데, 2시간을 걸어서야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되어 겨우 사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인원 점검을 하고 함께 밤을 새웠다.

 

아침에 현지 경찰들이 출동해 어느 정도 수습을 하고 나서야 우리는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야말로 폭격 당한 것처럼 처참하게 변한 우리의 보금자리….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 그 날 휴가가 예정돼 있던 직원들은 슬리퍼를 신은 피난민 상태 그대로 두바이공항으로 떠났다.

 

그때 당시 현장은 시운전이 시작될 무렵이라, 유럽 주설비 제작 공급사에서 파견된 기술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한 사람도 남김 없이 귀국을 해버렸고, 어렵게 동원한 3국인 기술자와 한국인 반장들마저 치안에 불안을 느껴 이란을 떠났다. 결국 남은 공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말았다. 만일 그 당시 공백을 만회하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렸다면 31개월 만에 Gas-In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폭동으로 불타고 파괴된 캠프를 보고 망연자실해 하는 직원들]

 

화재에도 좌절은 없다

 

후속 프로젝트인 4&5단계 공사에서는 2&3단계처럼 폭동사태는 없었지만, 우리의 간담을 서늘케 한 Flare Stack 화재 사건이 발생했다. 공사 개시 24개월 만인 2004년 3월 20일 Train-1이 Gas-In을 했다. 그러나 시운전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던 #4 Flare Stack이 2004년 8월 31일 저녁에 화재로 무너져 내렸다. Flare Stack는 2&3단계와 달리 환경문제로 현장에서 2km 떨어진 산꼭대기에 세워졌다. 산 위에 세워진데다 저녁시간이었으니 반경 20km 내에서 모두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사고였다.

 

어렵사리 소방차가 산길을 올라갔지만 붕괴와 폭발 위험으로 도저히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거대한 철탑이 시뻘건 화염에 휩싸이며 타다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모두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착공 후 24개월 만에 Gas-In이라는 세계신기록 달성을 이루고 준공을 4개월 남겨둔 시점이었다. 우리 모두의 꿈이 하룻밤 사이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Flare Stack 없이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재발생 즉시 안전조치를 취해 플랜트는 아무런 후속사고 없이 비상 정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현장 전 직원이 힘을 합쳐 사고 3일 만에 5단계 Flare Stack Line을 살려냈다.

 

발주처와 많은 경쟁사들이 우리의 시공능력을 의심하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때, 현대건설의 기술진들은 주저앉지 않고 또 한 번 ‘하면 된다’는 불타는 의지와 투혼을 발휘했다. 사고 원인을 즉시 파악하고 개선하여 재설계 작업에 들어가는 한편, 서울과 유럽의 제작사에 납품을 독려하는 태스크포스팀을 즉시 가동해 24시간 작업을 진행했다. 엄청난 물량의 Flare Stack Pipe를 항공기로 실어 나른 현장은 아쌀루에 프로젝트가 유일할 것이다.

 

현장에서는 불탄 굴뚝을 기초부터 재시공하고 자재가 도착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설치했다. 이 모든 과정을 불과 3개월 만에 완벽하게 복구함으로써 발주처는 물론 전 세계인에게 현대의 기술력과 저력을 알렸고, 실추된 명예 또한 회복할 수 있었다.

 

 

[화재로 붕괴되는 Flare Strack]

 

 

발주처가 인정한 현대건설의 기술력

 

아쌀루에 가스처리시설 공사는 이란과 카타르 사이에 있는 페르시아만 공해상의 해저에서 가스를 뽑아 올린 후 해저에 파이프를 설치해 육상에 있는 플랜트에 공급하는 프로젝트다.

 

 

[시공중인 Offshore Plastform]

 

 

육상 공사는 현대건설이 설계, 기자재 공급, 시운전 등 전 공정을 맡았고 해상에 설치되는 플랫폼은 ENI와 현지업체가 수행했다. 하지만 플랫폼 공사가 늦어지다 보니 발주처가 우리에게 중단된 플랫폼 공사를 맡아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줄곧 우리가 맡은 공사의 공기를 준수하느라 모두가 지친 상태였기에 그 프로젝트마저 도맡기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컸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끝나려면 해상가스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심 끝에 발주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막상 플랫폼 실사를 해보니 도면도 제대로 안 맞고 자재도 도통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공한 부분도 거의 새로 시공해야 할 실정이었다. 하지만 이왕 하기로 한 것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플랫폼을 해상으로 끌고 가서 시공, 시운전을 동시에 실시하는 한편 돌관공사도 해야만 했다. 육지에서도 덥고 습기가 많아 공사 수행이 어려웠는데 해상에서의 상황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야말로 10분만 일하면 온몸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으니 그 고생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오직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우리는 뭉치고 단합하고 참고 견뎌 목표를 이뤄냈다. 명실 공히 현대건설의 의지와 기술력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만일 현대건설이 플랫폼 공사를 하지 않았다면 최단기간 Gas-In 세계신기록은 물론 우리의 위상도 물거품이 된 채 반쪽 프로젝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현대건설이 넘지 못할 산은 없다

 

하지만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준공을 2주 남겨놓은 12월 13일. 마무리를 끝내고 현장 청소를 하던 중 갑자기 5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져 모든 현장이 물바다가 되고 건물이 침수되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이란사람들조차 이런 큰 비는 처음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