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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필자 정주영氏

등록일 : 2015/03/16

나는 우리 현대가 참여하고 건설한 지난날의 수많은 업적 가운데서 가장 빛나는 이정표로 태국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공사를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파타니 -나라티왓 도로공사는 우리 회사가 국제적으로 발전하고 진출하는 결정적 게기였으며, 또 국내적으로는 국가경제개발계획의 초기 단계에서 우리가 보여준 구체적이고 확실한 희망의 이정표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주지의 사실로써 우리 회사는 이 공사를 통하여 계약금액의 절반이 넘는 3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손해를 보았다. 그것은 그 시절의 우리 사정으로 볼 때 막대한 재정적 손실이었다. 현대건설은 첫 해외진출에서 실로 엄청난 손해와 시련을 겪었지만, 회사의 모든 역량과 끈기와 성의를 다해서 이를 극복함으로써 세계속의 현대로 성장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이 공사를 통해 다질 수 있었다.

 

비록 금액적으로는 3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손해로 끝난 공사이지만, 그 모든 난관을 묵묵히 극복하며 공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준공함으로써 우리는 천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신뢰를 격전의 훈장처럼 받았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 현대의 이러한 근면과 끈기와 성의를 태국 정부는 물론 다른 모든 국제적인 건설업자들도 칭찬하였다. 어찌 보면 우리가 그만한 손해와 그만한 칭찬을 함께 받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현대는 고속도로 공사가 처음이었고 본격적인 도로공사에 투입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지 못했으며, 국제 규격의 시방서대로 공사해 본 경험 또한 일천하여 도로공사의 기본인 층 다짐조차 모를 지경이었으니 그 정도의 수모는 일견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공사를 실패한 부끄러운 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현대가 크게 세계속으로 발전하고 뛰어오른 도약의 발판이고 빛나는 이정표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였다. 우리는 이 공사를 경험함으로써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보다도 본격적인 국제규격의 고속도로 시공경험이 그것이고, 국제 시방서 적용, 장비운영 방법, 아스콘 생산, 외국의 기후 풍토 생활습관 등에 대한 대응 방법, 인력관리 방법 등 그때로선 한결같이 첫 경험일 뿐인 수많은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일들이 바로 우리 현대건설이 우리나라 건설업체가 해외진출의 첫 번째 공사에서 얻은 소중한 결과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며, 그 모든 땀의 결과로써 곧바로 민족의 대동맥인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하고 선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속의 빛인 것이다.

 

 

세 번째 만에 이룬 쾌거

 

이 고속도로는 태국의 남단 말레이시아 국경 부근에 위치한 두 도시 파타니와 나라티왓을 잇는 길이 98km의 2차선 고속도로로써 1966년 1월에 착공하여 1968년 3월에 준공되었다. ´65년 9월 30일 태국 정부가 IBRD 차관사업으로 국제 경쟁입찰에 붙인 이 공사에는 우리 현대를 비롯하여 서독, 일본,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 등 16개국의 29개 업체가 응찰했는데 현대는 세계의 유수 기업들을 물리치고 이 공사를 약 522만 달러에 따내었던 것이다.

 

이것은 현대가 해외진출을 계획하고 수주활동에 뛰어든 이후 세 번째 만에 이룬 쾌거였다. 우리는 이미 태국공사에 두 번 응찰한 경험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었다. 그래서 이 공사의 입찰 때에는 내가 직접 관여하여 견적도 내고 입찰서도 작성을 하였다.

 

수주 후 약 3개월간에 걸쳐 기술자 및 기능공 파견, 장비, 자재수송, 현장조사 및 측량 등의 준비작업을 마치고 본공사에 들어간 것은 ´66년 1월 7일의 일이었다. 수많은 난관과 시행착오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총 길이 98km의 2차선 고속도로, 3개의 PC 빔 장대교와 35개소의 소교량 및 기타 부대시설로 되어 있는 공사내역은 우리로선 모두가 새롭고, 미국의 기술용역업체인 De Leuw Cather 사의 철저한 감리 감독을 받으면서 미연방 시방서에 따라 시공하게 되어 있었다.

 

근대화된 건설기술의 경험이 일천했을 뿐만 아니라 남태국의 기후, 풍토 및 주민들의 생활습관 등에 대한 사전조사 역시 미비했고, 언어소통 마저 제대로 안되어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공사였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태국 현장에 자주 가서 작업을 독려하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한달이면 10여일을 그곳 현장에서 생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 현대의 기술진들은 전압을 하지 않던 우리나라의 재래식 방법을 그대로 썼다. 토공 및 구조물 공사 등을 98km 전 구간에 널려 놓은 채 시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결과 공사구간이 워낙 넓어서 장비 이동이 힘들고 장비 대기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져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간에 따라서는 극심한 장비부족 현상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현장에서 작업을 독려하고 지시할 때는 조금은 과다하게 지시하고 또한 철저히 확인하는 입장인데, 공사실적이 그토록 지지부진하였으니 아마도 그때의 실무진들은 내 불호령을 견뎌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보다 못한 우리 공구장들이 자존심을 내던지고 감독에게 솔직한 견해를 요구했던 모양이다. 정확한 보고가 올라왔다. 감독이 말하기를 당신네는 중기를 몇 킬로미터에 하나씩 벌려 놓고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왜 한군데 집중시켜 결과가 눈에 보이도록 하지 않는가 되묻더란 것이다. 나는 즉각 감독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가능한 한 파타니 쪽의 작업을 현 상태에서 잘 정리하고 장비를 한쪽으로 모았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통제가 원활하고 그 진척을 한눈에 바라보면서 나라티왓 쪽으로부터 작업을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경험부족에서 오는 시행착오와 웃지 못할 일, 또 그 해결을 위한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도 많았다.

 

이 공사전까지 현대건설은 표층에 사용될 아스팔트 콘크리트(아스콘)를 생산해 본 경험이 전혀 없어 아스콘 기능공들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시에서 직영하던 중곡동에 있는 서울의 유일한 아스콘 공장 기능공들을 데려왔다. 아스콘을 생산하기 위한 바버그린(Barber Green)이라는 유명 메이커의 자동식 아스콘 기계를 구입하여 사용했으나 처음에는 기계의 성능에 훨씬 못 미치는 50% 정도의 가동율밖에 얻지 못하였다. 아스콘은 모래, 자갈, 아스팔트를 적당한 비율로 섞은 후 구워 만드는데 기능공들은 혼합비율과 온도 등 기본원리는 알았지만 재료를 섞기 전의 함수율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못 미쳤던 모양이다.

 

즉, 태국이라는 나라는 비가 많이 오는 열대지방이라서 모래며 자갈 등이 항상 너무 젖어 있었고, 그대로 섞을 경우 함수율이 맞지 않아 아스콘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2~3개월 고심한 후에야 알아내어 건조기(Dryer)에 자갈을 넣고 말리려 했으나 이번엔 건조기 자체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았다. 나는 여러 가지로 화도 나고 건조기에 비싼 기름을 때고 있는 미련한 짓도 보기 싫어서 골재를 직접 철판에 올려놓고 구우라고 지시했다.

 

당시의 김영주 상무와 플랜트 담당기사 홍석의에게 그 일을 시켰는데 한동안 그들에게는 그것이 주 업무였다. 그들은 그 더운 중에도 하루를 빼놓지 않고 골재를 구워내야 했으므로 땀에 젖어있는 것은 예사였고 심지어 수염까지 빨갛게 익었을 정도이니 지금 생각해도 그리운 웃음이 저절로 나올 일이다. 그러나 그 덕택에 건조기를 이용할 때보다 생산능률을 2~3배까지 높일 수 있었고 아스콘의 원활한 생산에 성공하였다. 그 밖에도 박장대소할 일이 많이 있다.

 

나라티왓쪽의 토공 담당이었던 당시의 백동명기사는 고속도로 공사가 처음이라서 구조물의 뒷채움이라는 말조차 처음이었는데, 소교량 작업 후에 토공으로 마무리해야 할 때였다. 우선 암거를 완성하고 뒷채움 준비를 서두르며 기술용역 회사측 감독에게 내일부터 뒷채움을 시작하겠다고 통보하였다. 그러자 미국인 감독 리치는 눈을 크게 뜨며 무엇으로 전압을 하겠느냐고 물었다. 여기에 백기사는 의기양양하게 그것은 걱정마라. 내일 당신에게 전압할 공구를 보여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나름대로 전압준비를 철저히 하고 그는 이튿날 약속시간에 감독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감독이 나타나서 어디에 공구가 있느냐고 물을 때 백기사는 보란 듯이 암거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통나무로 만든 떡메같은 소위 망께라는 것을 여러개 만들어 두었었는데 감독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백기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래고래 소릴 지르며 욕설과 함께 그 통나무를 훨훨 집어던지곤 가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한심한 촌극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후에야 그는 교량이나 암거의 뒷채움이 도로공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부분의 하나라는 걸 알았다.

 

이처럼 우리 현대는 그 당시 전혀 경험이 없는 대형공사에 손을 대고 있었던게 분명하지만 실무자 모두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을 한번 잘 해보려고 별의별 아이디어를 다 짜내고 있었으니 실로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항상 직원들의 그러한 태도, 그러한 마음가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한 성실성에 의해서 우리 현대는 그 당시 고속도로의 기본적인 시설조차 모르면서도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으며, 컴프렛셔, 에어햄머를 이용하여 뒷채움을 시작하고, 컴팩터와 햄머를 구입 작업을 속속 진행하면서 건설의 공사에 따라 적정한 장비의 조합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에 대해서도 단순한 주먹구구식이 아닌 그 젊은 혈기의 온몸으로 확실하게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담담한 마음을 갖자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업무량의 과다나 어떤 일을 수행하는데 무수한 난관이 산재해 있다는 등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모든 일에는 문제점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일의 성패여하도 나는 크게 문제 삼지 않을 때가 있다. 왜냐하면 일에 임하는, 그리고 그 결과를 바라보는 마음의 상태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어려운 일에도 방법은 있게 마련이다. 처음부터 곤란한 문제를 제기하고 불리한 생각만 한다거나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다만 어떻게 해서든지 이 일을 성공리에 잘 처리해 보겠다는 능동적인 자세와 그 열심인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기실 그러한 적극적인 마음과 자세만이 어떠한 새로운 일도 해결할 수 있는 무궁한 힘이라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생각건대 태국 나라티왓에 모인 우리 현대건설의 젊은 공구장들은 한결같이 다 그렇게 열심이었을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없이 실수를 하면서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일을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엄청난 액수의 재정적 손해를 보면서도 그보다 더 큰 경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귀중한 신용과 노하우를 얻었다고 스스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다 그런 마음의 연유에서 이다.

 

그래서 나는 평소에 나의 부하직원들에게 담담한 마음을 가지기를 권한다. 담담한 마음이란, 그러므로 일을 향한 가장 적극적인 때 묻지 않은 마음이다. 사심이나 잔꾀, 어떠한 권모술수도 없는 순수하고 우직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일의 성패에 관계없이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여 큰 인물로 중용하고 굳건히 신뢰하면서 우리 현대건설도 그 일로 말미암아 큰 손해를 본게 아니라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대단히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공기보다 3개월 늦게 준공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수, 그리고 거액의 재정적 손실과 함께 이 공사는 계약 공기보다 3개월 늦게 ´68년 3월에 준공되었다. 또한 태국의 이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야말로 우리들이 새로운 세계로 전진하는 빛나는 이정표적 대역사였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실패했다거나 큰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로써 그 먼 이국땅에 희망의 씨앗을 심은 것이었다. 우리는 이때에 얻은 훌륭한 교훈과 경험을 바탕으로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성공적으로 시공하였으며, 국내의 경제개발계획을 선도할 수 있었다.

 

´68년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될 강시 어느 연설에서 나는 태국의 고속도로가 우리에게 준 희망을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언어, 풍습이 다른 태국에서 수많은 애로와 고통과 싸우면서 견인불굴의 감투정신과 불안불휴의 노력은 우리의 미경험에서 오는 모든 결함을 보완하고 성공적인 완공을 가능케 하였으며, 우리의 노력은 태국 정부나 건설업계는 물론 모든 국제적인 업자들에게 절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해외건설시장 개척의 초기단계에서 물질의 결손은 있었으나 아시아 전역에서 중동지역에까지 건설시장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렇듯 확실한 희망임을 역설했고, 그 모든 예감은 곧바로 가시적 현실로 나타났다.

현대는 첫 해외진출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우리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이를 극복함으로써 본격적인 세계 굴지의 건설회사로 발돋움 하였던 것이다.